원래 평면성과 입체성과의 모순은 처음부터 회화예술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었다 르네상 스 이래의 서구회화는 원근법과 명암법에 의하여 三차원 세계의 환영을 화면 위에 계속 추구해 왔는데, 그때 평면성의 강조는 당연히 부정되어 왔다. 인상파의 등장은 세계를 모두 「빛의 양상 밑」으로 바라봄으로써 깊이를 잃게 하고 차츰 화면을 평면으로 근접시켜 나갔 다. 모네가 만년의 수련(睡蓮) 화면에서 연못 기슭과 하늘을 없애고 수면만을 그리게 된 것도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인상파의 세례를 받은 세잔느는 당시의 전통적 회화가 고치려 하고 있었듯이 원근법과 명암법에 의한 입체표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그것은 색채의 풍요함을 희생시키고 그 자 신의 감각을 배신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는 화면의 二차원성..
그러면 그토록 오랫동안 모델을 바라보면서 세잔느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앞에서 인용한 가스케에게 낸 편지의 한 절로도 명백하듯이、그는 우선 모델을「보고」 있었다.그는 자기의 눈을 통하여 눈앞의 대상의 모든 것을「읽으려고」하고 있었다. 그러 나 그가 〈온실 안의 세잔느 부인>의 모습에서 보고 있었던 것은 모네가 본 것 같은 모든 것이 매혹적인 빛의 물결에 뒤덮이는 세계도 아니고、르노와르가 보고 있었던 잘 익은 과 일같이 따스하고 싱싱한 살결의 매력도 아니었다.그가 추구한 것은 눈앞의 대상을 형성하 는 본질적인 구조였다.모든 것이 결같은 빛의 물결로 환원되어 버리는 인상파의 세계 속 에서, 세잔느는 대상을 주위의 세계로부터 구별하는 기본적인 형태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그와 같은 확고한 형태를 추구한..
이탈리아 피렌체 하면 떠오르는 인물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나리자라는 그림으로 더 친숙한데요. 당시 다빈치는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요청으로 1516년 프랑스로 떠나게 됩니다. 이때 떠난 지 2년 만에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오게 되는데요. 그동안 머물던 곳에서는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할 수 없어 답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최후의 만찬인데요. 이전까지의 미술작품들은 주로 종교나 신화 이야기를 담고 있었지만 최후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와의 마지막 날 밤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한 원근법을 적용하여 3차원 공간감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남아있는 ..
1.지난번에 이어 또다시 이탈리아 화가 바로 줄리오 로마노인데요. 18세기 베네치아파 미술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럽 전역으로는 프랑스 혁명 이후 일어난 계몽주의 사상이 유행이었는데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줄리오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물들은 위 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마치 르네상스 시기 라파엘로의 화풍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 여기서 잠깐!! 19세기 초 파리 살롱전 풍경을 잠시 감상해보실까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예술가는 더 이상 귀족 계급의 후원 없이 오로지 작품만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전과는 달리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고 다양한 실험 정신이 깃든 작품들이 대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