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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가 처음 로마에 왔을 때 극적 장면을 요구하는 주문이 없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이상화된 인물들을 모은 그림들을 주문받았다. 사람들이 조용한 자세로 함께 모여 있는 그림들, 따라서 단순한 동작에도 예술적 창안이 드러나야 하고 배치에 섬세한 감각이 요구되는 작업들이었다. 라파엘로는 성모상을 그리면서 훈련한 조화로운 선들의 흐름과 집단의 균형에 대한 감각을 이제 더 큰 규모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성체 논쟁>과 <아테네 학당>에서 공간을 채우고 그룹을 결합시키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뒷날의 극적인 그림들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오늘날 관객은 이 그림들의 예술적인 내용을 공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의 관객은 미술의 가치를 다른 곳에서 찾는다. 등장인물들의 생김새와 개별 인물들 간의 사상적인 관계 같은 것에서 가치를 찾는다. 무엇보다 인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해하고, 그들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하면 불안해 한다. 여행 안내자가 각 인물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일러주면 고맙게 경청하고, 그런 설명을 듣고 나면 그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쯤에서 벌써 그림을 다 본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양심 있는 몇몇 사람은 얼굴의 표현에 '몰입' 해보려고 인물들을 뚫어질 듯이 바라본다. 일부 사람들은 얼굴 말고도 신체의 동작 전체를 파악하고 아름답게 기댄 모습과 선 모습, 앉은 모습의 모티프들에 대해서도 느껴보려고 한다. 오직 극소수 사람들만이 이 그림들의 원래 가치는 개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배치와 공간의 리듬 있는 생동감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짐작한다. 이것은 가장 거대한 양식으로 이루어진 장식적인 작품들이다." 물론 우리가 쓰는 말뜻과는 조금 다르게 장식적이다. 개별 인물들이나 심리적인 맥락이 아니라 평면 안에서 인물들의 배치와 그들의 공간적인 분포 관계를 크게 강조하는 그림들을 말하는 것이다. 라파엘로는 이전의 누구보다도 인간의 눈에 편안
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감각을 가졌다.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꼭 역사적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생각들이다. <아테네 학당>에 심오한 철학사적 맥락의 표현을 찾거나 <성체 논쟁>에서 교회사의 결산을 찾아내려고 한다면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라파엘로는 꼭 이해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자리에는 그림 안에 글자를 써넣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주요 인물들, 전체 구성을 담당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주어지지 않았다. 예술가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신체적·정신적 움직임의 모티프가 전부였을 뿐,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인물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지 않고 그들이 무엇인지에만 집중하였다.
이런 관점을 공유하려면 일종의 눈의 감각성을 지녀야 한다. 이런 것은 오늘날 드물다. 그리고 북방 게르만 혈통의 사람은 남방 로만 혈통의 사람이 신체적인 표현과 거동에서 어떤 것을 중시하는지 느끼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러므로 북유럽에서 온 여행자가 최고의 정신적 잠재력의 표현을 기대한 이 장소에서 느낀 실망감을 우선 극복해야 한다 해도 너무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렘브란트라면 물론 철학을 전혀 다르게 그렸을 것이다.
선의를 가지고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인물 하나하나를 분석해서 완전히 외우고, 그런 다음 하나의 부분이 다른 부분을 어떻게 제한하고 조건짓는지 결합 부분에 주목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여행 안내서>에서 주는 충고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충고를 따랐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일을 위해서는 시간이 넉넉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 확고한 토대를 얻으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의 시각은 대충 전체적인 인상만 보면 되는 현대의 수많은 화보 그림들을 통해 대단히 표피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옛날 그림들에 대해서는 기초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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