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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주제를 가진 그림들을 발전 순서대로 모아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성모가 책을 들고 있는가, 아니면 사과를 들고 있는가, 혹은 노천에 앉아 있는가 하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다. 소재의 특성이 아니라 형식의 특성을 이 그림들을 분류하는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러니까 성모가 절반의 모습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전체 모습을 드러내는가, 한 아이와 그룹을 이루는가, 아니면 두 아이와 그룹을 이루는가, 다른 성인도 등장하는가 하는 것들은 예술적으로 중요한 질문들이다.
우선 가장 단순한 경우, 곧 절반의 모습만 그려진 성모상부터 시작해보자. <대공의 성모>를 맨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서 있는 인물의 수직선과 약간 두려운 듯 앉아 있는 아기의 모습에서 아주 소박한 형태로, 본질적으로 성모의 머리가 약간 옆으로 기운 데서 생겨난 특이한 효과가 살아있다. 타원형 얼굴이 대단히 아름답고, 표현이 놀랍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굴 전체가 보이도록 살짝 옆으로 기운 비스듬한 머리의 선만이 전체에서 유일한 변화이며, 지극히 단순한 방향 체계가 아니었다
면 이런 효과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고요한 그림에서는 아직도 페루 지니 유파의 숨결이 느껴진다.
피렌체에서는 다른 것, 그러니까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동작을 좋아했다. 아기가 직각으로 앉은 자세는 뮌헨의 <템피의 성모>에서 이미 중단되었다. 대신에 절반쯤 누운 자세가 도입된다. 아기는 몸을 틀고 사지를 힘차게 돌린다(<오를레앙의 성모>, <브리지워터의 성모>), 어머니는 앉은 채 몸을 앞으로 숙인 뒤 다시 옆으로 돌리고, 그 결과 그림은 갑자기 풍부한
방향 축을 갖는다. <대공의 성모>와 <템피의 성모>에서부터 규칙적인 길을 거쳐서 <세디아의 성모>(피티 미술관)에 이르는 발전이 이루어진다.
<세디아의 성모>에는 어린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는데 그 결과 조형적인 풍부함이라는 측면에서 최상의 것, 곧 깊이와 다양성을 얻는다. 이 그룹은 서로 꼭 달라붙은 채 좁은 틀 안에 넣어져 더욱 효과적이다.
두 번째 주제, 즉 아기 예수와 세례자 요한을 거느린 성모의 전신상  거의 비슷한 발전을 보인다. 라파엘로는 처음에 극히 조심스럽게 깨끗하고 섬세한 선을 가진 <방울새의 성모><우피치 미술관)를 그렸다. 앉아있는 성모의 양편에 아이들이 서 있다. 그것은 이등변 삼각형의 도식에 따른 구조이다. 선들은 피렌체에는 알려지지 않은 섬세함을 보이고, 중량은 황금의 저울에 단 것처럼 양쪽이 정교하게 같다. 어째서 성모의 어깨에서 외투가 아래로 흘러내리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쪽으로 흐르는 윤곽선이 성모의 손에 든 책에서 불거지는 것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곡선은 균일한 리듬으로 끝까지 매끄럽게 내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다음 점점 더 큰 움직임에 대한 욕구가 나타난다. 아이들은 점점 다른 모습을 하게 된다. 요한은 무릎을 꿇거나(루브르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 두 아이들이 한 편으로 모인다(빈 박물관의 <초원의 성모〉〉. 동시에 성모는 그룹을 더욱 긴밀하게 싸안고 대립하는 방향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기 위해서 더 깊숙이 앉는다. <알바 집안의 성모>(워싱턴)에서 볼 수 있는 놀라울 정도로 집중된 풍요함이 그림에 나타난다. 그것은 <세디아의 성모처럼 로마의 거장 시절에 속하는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성 안 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루브르)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뮌헨의 <카니자니 집안의 성모>에 나타난 방식의 성 가족 그림들은 그보다 더 풍부한 주제를 포함한다. 이 작품에는 성모와 요셉과 요한의 어머니와 두 아이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 그러니까 다섯 인물의 그룹 모습이다. 처음 해결책은 여자 둘이 무릎을 꿇은 채 아이들을 그 사이로 붙잡은 모습이 그림의 바닥 부분을 이루고, 서 있는 요셉이 정점을 이룬 순수한 피라미드형이었다. <카니자니 집안의 성모〉는 페루 지니의 능력을 넘어선 형식을 다룬 작품이다. 움브리아 식으로 투명하고 명료하면서도 피렌체 방식으로 동작을 풍부하게 채운 작품인 것이다. 로마에서 그의 취향은 거대한 것과 강력한 대조를 더욱더 지향하며 발전했다.
후기 로마 시대에 나온 대립적인 예는 <거룩한 사랑의 성모〉(나폴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의 진품이 아니지만 그가 가졌던 새로운 의도에 대해서는 완벽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 옛날의 이등변 삼각형의 변의 길이가 달라졌고, 옛날에 가파른 모양을 이루던 그룹이 깊숙이 내려앉았으며, 한때 가볍던 그림이 무거워진 것 등 이런 것들은 그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변화들이다. 한편으로는 두 여자가 나란히 앉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셉이 균형을 위해서 고립된 모습으로 공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프랑수아 1세의 성모>(루브르에서는 그룹 조직을 완전히 부정하고, 대신 회화적으로 인물들이 덩어리를 이루어 뒤얽힌 그림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그 이전의 구조와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피렌체의 라파엘로는 거대한 그림인 <천 개天)의 성모>로 성자들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은 성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보여준다.
피렌체 시절 라파엘로와 가장 가까웠던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그룹화에서 나온 강력한 개성의 모티프들이 페루 지니의 단순성과 바로 이 지점에서 뒤섞인다. 옥좌의 소박함은 완전히 페루 지니 방식이다. 다른 한편 닫힌 윤곽을 가진 베드로의 화려한 모습은 프라 바르톨로메오가 없었다면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특성과 나란히 하나의 완벽한 단절
이 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로마에서 분명하게 그림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하늘에 있는 천사와 배경이 되는 완벽한 건축물, 그리고 그림판을 위아래로 상당히 높인 것 등이다.”
로마의 취향은 공간을 더 많이 요구하였다. 라파엘로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쌍을 이룬 성자들도 더욱 촘촘한 그룹으로 모았을 것이다. 성모를 더 아래쪽으로 끌어내리고 강력하게 뭉쳐진 모습으로 전체를 표현했을 것이다. 이 자리, 그러니까 피렌체의 피티 궁전에서, 이런 취향에 대해 10년 뒤에는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를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그림 <복음서 저자들과 부활하신 예수>를 그것과 비교해보기만 하면 된다. 이 그림은 더 단순하고 더 풍부하며 더 다양하고 더 통일적이다. 이것을 비교하는 김에, 옥좌 앞에 서 있는  천사 소년들이 비록 대단히 매혹적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성숙한 라파엘로라면 그들을 이런 맥락 속에 넣지 않았으리라고 눈치채게 된다. 그림에는 이미 수직선들이 충분하다. 여기서는 대립되는 선들이 필요하고, 그래서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그림 속 소년들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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