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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에 있는 사랑스러운 작은 사원은 아주 위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인물들과는 단 하나도 겹치는 선을 만들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페루 지니의 순수한 양식을 볼 수 있다. 로마에 있는 페루 지니의 <그리스도가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하사하심이라는 거대한 프레스코에서 동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인물 부분과 건축 부분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떨어져 있다. 사람들의 모습은 같은 포도(道)의 판 위에서 깨끗한 실루엣으로 표현되어 있다.
피렌체의 화가라면 마리아의 결혼식 이야기를 얼마나 다르게 다루었을까. 거기서는 떠들썩하게 일이 진행되고 사람들은 유행하는 화려한 옷차림을 보기를 원하며, 구경꾼들은 서서 구경하고, 우수에 차서 체념하는 구혼자 대신 주먹을 움켜쥐고 신랑에게 달려드는 젊은이들 패거리를 보게 된다. 정말이지 싸움판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다. 그런데도 요셉이 조용히 서 있다는 사실에 경탄하게 된다. 어째서 그럴까? 이 모티프는 14세기에 이미 나타난 것으로 법적인 설명이 붙는다. 이런 싸움질을 통해 사실을 표현하려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에 따라서는 임머만의 <대법원>에 나오는 같은 장면을 연상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주먹질하는 법을 미래의 남편에게 알려주려고 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이런 피렌체로 와서 두 번째 학습 과정을 거치게 된다. 3, 4년이 지난 다음 보르게제 미술관에 있는 <그리스도의 매장>을 내놓았을 때는 그의 원래의 모습을 거의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부드러운 윤곽선, 명료한 그룹의 모습, 온화한 감성 등을 모두 버린 것이다. 피렌체는 그의 발상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이  동작에 대한 문제들이 전면으로 부각된다. 그는 생생한 사건과 기계와도 같은 근육의 움직임, 강력한 대조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의 인상이 그의 내면에서 작동한다. 그런 위대한 업적들에 비하면 자신의 움브리아 방식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매장은 페루지아에서 주문받은 것이었다. 라파엘로가 그런 이런 장면이 아니라 페루지 노가 그린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함> 같은 장면이 분명히 원래 주문자의 의도였다. 페루 지니의 그림은 피티 궁전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움직임을 피하고 죽은 사람을 놓고 탄식하며 둘러선 사람들의 모습만 보여준다. 우수에 젖은 얼굴과 아름다운 자세를 모아놓은 그림이다. 라파엘로는 처음 단순한 애도 장면을 생각했다.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드로잉도 있다. 그러다가 방향을 바꾸어서 시신을 운반하는 장면을 묘사하기로 했다. 그는 시신을 들고 묘지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두 남자를 그렸다. 그들은 나이와 성격이 차이나는 데다가, 한 사람은 뒤쪽으로 걸으면서 동시에 발뒤꿈치로 몇 개의 계단을 더듬어 올라가야 한다는 점을 통해 모티프가 복잡하게 되었다.
딜레탕트들은 그렇게 순수한 육체적인 모티프의 가치를 머뭇머뭇 겨우 이해한다. 그들은 가능하면 영적인 표현을 많이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움직임과 나란히 고요함을 표현하면 효과가 더 커지고, 기계적인 작업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대립시키면 참가자들의 적극성이 더욱더 뚜렷해진다는 이점만은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페루지 노가 사람들 머리에 균일한 정서를 부여함으로써 구경꾼을 지겹게 만드는 데 반해 라파엘로는 강한 대조를 통해서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이 그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어깨를 추켜올리고 머리를 뒤로 축 늘어뜨린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것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같은 모티프이다. 라파엘로의 신체에 대한 지식은 표피적이고, 사람들의 머리는 각각 힘을 갖지 못했다. 관절도 약하다. 그리스도를 들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젊은 쪽이 두 다리로 굳건하게 버티지 못하고 그의 오른손이 불확실하다는 점은 곤혹스럽다. 나이 든 쪽이 그리스도와 머리 방향이 같은 것도 눈을 방해한다. 이 그림을 준비하기 위한 스케치에서는 이것을 피했었다.
그러면서 그림 전체가 혼란스러워졌다. 다리들이 마구 뒤엉킨 것은 언제나 거듭 비난을 받았다. 나아가 늙은 니고데모(니코데무스)는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여기서도 원래의 명료하던 의도가 희미해진 듯하다. 스케치에서 그는 지나치게 서두는 막달레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완성된 그림에서는 이해할 수 없게도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그의
다른 동작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과 아울러 이 네 사람의 머리가 그토록 다닥다닥 붙어 있기에 생기는 불쾌감을 더욱 크게 만든다.
막달레나가 행렬을 쫓아가면서 주님의 손을 받들고 있는 아름다운 모티프는 고대의 모범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오른팔은 움직임이 분명하지 않다. 기절한 어머니를 둘러싼 그룹 모티프는 다시 페루 지니 유파를 훨씬 넘어섰다. 앞쪽에 무릎을 꿇은 인물은 미켈란젤로의  나오는 성모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토록 섬세한 감각을 가진 라파엘로가 팔들을 이토록 마구 뒤엉켜놓았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이 그룹은 전체적으로 보면 불행하게도 잘못 표현되어 있다. 라파엘로가 처음 의
됐던 것, 즉 여인들을 주요 그룹의 움직임 안에 받아들인 상태에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들을 따라가도록 했더라면 훨씬 더 올바른 배치였을 것이다. 지금 그림은 둘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또 말할 것이 있다. 그림의 정사각형 모양은 효과를 방해한다. 행진하는 인상을 주려면 그림의 표면이 전체적으로 특정한 방향을 가져야 한다. 티치아노의 <그리스도의 매장>은 그림판의 비율에서 얼마나 많은 덕을 입었던가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매장>에서 어떤 부분이 다른 사람의 손길로 그려진 것인가 하는 것이 논란거리다. 이것은 분명 당시의 라파엘로에게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과제이다. 그는 분명히 놀랄 만큼 자신을 바꾸어서 피렌체의 문제에 몰두할 재능이 있었지만, 한동안은 그 일에 너무 빠져서 자신을 잃은 듯하다.
피렌체의 <성모>들 <그리스도의 매장보다는 성모의 그림들에서 라파엘로의 의도와 수단이 훨씬 더 순수하게 결합되었다. 라파엘로는 성모 화가로 인기를 얻었거니와, 형식 분석이라는 조잡한 도구로 이 그림들의 마법에 접근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인 듯하다. 세계의 다른 어떤 예술가의 경우에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이 그림들은 복제품이 많이 나돌아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하다. 모성의 깊은 내면과 어린이의 우아함 혹은 장엄한 기품, 그리고 특이하게 초자연적인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예술가의 의도를 물어볼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드로잉들을 한번 살펴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예술가는 구경꾼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문제 삼거나, 개별적인 아름다운 머리나 이런저런 어린아이의 모습 등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그룹의 전체적인 배치, 서로 다르게 움직이는 지체와 머리의 방향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 등을 자신의 문제로 삼았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누구라도 감정적인 면으로 라파엘로에게 접근할 수는 있다. 하지만 예술적인 의도의 본질적인 부분은 정서적인 감정 추적을 넘어서 형식적인 관찰을 하는 관객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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