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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1964년)에 아테네의 시문(門)인 디필론 앞의 성도(聖道) 곁에서 발굴된 묘비이다. 고대에 어떠한 이유로 파손에 앞서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부조의 바탕에는 전면에 밝은 청색이 칠해져 있으며 발아래에는 빨갛게 채색한 흔적이 남아 있다. 꼭대기 중앙에는 문장 모양(紋章模樣)으로 마주 보고 있는 표범과 사자가 그려져 있고, 양쪽 가장자리(兩端)에는 뱀이 그려졌으며, 그 위의 아크로 테리아에는 팔 멧트(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샌들의 끈도 물론 물감으로 그려져 있고, 이 묘의 주인공의 시선은(사진에서는 스토렌 흠집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정한 자리라고 볼 수 없는 곳을 향하고 있다. 이 묘비 아래의 묘에서는 다른 부장품과 더불어 두 가지의 청동제 스토렌 흠집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청년 에우페로스는 체육을 사랑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스에서는 체육 경기 때에 몸에 향유(香油)를 바른다. 그리고 경기 또는 연습 후에는 땀과 더불어 이 향유도 씻어 내는 것이었다. B.C. 5세기 앗티카에서 호화스러운 부조 묘비가 금지되었을 무렵에, 에게해의 이오니아계(系) 여러 섬에서 만들어진 묘비 부조는, 이 묘비와 같이 단독으로 옆을 향하는 입상이었다. 이 묘비의 옷 무늬나 체구의 살붙임은 그들의 작풍(作風)을 상기하게 한다. 이것은 파르테논 시대 이후에 비교적 빨리 만들어진 부조 묘비의 일례(一例)이다. 이 대리석상은 B.C. 5세기의 그리스 원작인데, 소녀의 아름다운 육체를 억제된 극적 자태로 표현했다는 점으로 유명하다. 제우스의 아비(愛妃) 레토에게는 자식이 둘밖에 없었다. 7남 7녀로 단란했던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레토를 얕보았다. 레토는 화가 나서 니오베의 자녀들을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시켜 차례차례로 죽여 버렸다. 이 상은 니오베의 딸 중의 하나가 신벌(神罰)의 화살을 등에 맞고 괴로워한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등에 꽂힌 화살을 뽑으려고 몸을 뒤로 젖히며 몸부림치자, 옷은 벗어져 내리고 아름다운 알몸이 노출되는 자태는 불쌍한 마음을 자아내게 한다. 얼굴의 표정에서 전신의 표정까지 비장한 기분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 인체의 데생은 정확한 구조가 결여되고 육체의 표면적인 추구에 지나쳐 있다. 작자는 이오니아계의 조각가라고 추측하고 있다. 인체의 엄격한 구성이나 질서 있는 동세의 추구보다도, 관능성을 지닌 비장한 기분을 노리고 표정과 자세를 효과적으로 맞추어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그러니까 벌써 어느 정도 바로크적인 데가 있고, 2~3세기 뒤에 출현하는 페르가몬의 조각이나 로도스의 라오콘 상 같은 극적인 조각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06년에 이「니오베의 딸」이 발견되었던 '사르스트의 뜰에서는 그 후 두 개의 소년 석상이 출토되었다. 승리의 여신 니케가 지금이라도 하늘에서 뛰어내릴 듯한 모습을 하는 이 상은,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외부, 높이 9m쯤 되는 삼각주 위에 얹혀 있던 봉납상이다. 이 기둥의 명문에 작자는 마케도니아 동부 칼키디케의 조각가 파이오니오스이며, 들보 장식도 같은 사람이 만든 것이라 표시되어 있다. 양쪽 날개를 크게 벌리고, 두 손은 망토 자락을 잡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얇은 옷은 바람을 받아 여신의 몸에 달라붙어, 휘날리는 옷 주름과 동그스름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뚜렷하게 나타내 보인다. 발가락 끝을 약간 굽혀 내린 발밑은 대지가 아니고 구름인 것 같고, 거기를 제우스의 표징인 독수리가 가로지르는 것은 올림포스산이 가까움을 암시한다. 옛날 어느 민족에도 '하늘을 나는 신'은 있었고, 이집트에도 메소포타미아에도 날개 달린 신이 있었지만, 그 발은 땅을 딛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실제로 하늘을 나는 신 눈으로 볼 수 있는 상으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 사람이 최초였다. 상은 B.C. 5세기 말 스파르타와 싸워 이긴 나프 팍 토스인과 멧세니아인이 신에게 감사하며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 봉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쟁의 승리를 감사하기 위해서 니케의 상을 만들어 신에게 봉납하는 풍습이 있었다. B.C. 5 세기 최후의 30년경에는 레키 토스의 형을 그대로 크게 대리석에 새겨, 이에 채화 또는 부조를 하여 묘표(墓標)로 하였으며, 이 묘표를 묘 위에 세우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리스 각지의 고대 묘지에는 직업적인 사람들이 새긴 것이 많이 보이나, 그중에는 배우 우수한 4,5기(基)의 아름다운 대리석 레키 토스형 묘비가 있다. 그중에서도 이 미리네 묘비는 부조의 주제에 있어서도 매우 유니크한 것으로서 솜씨가 극히 우수하다. 키톤 위에 머리에서부터 히마티온을 걸치고 목은 늘어뜨렸으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걷는 여성은 그 위에 분명히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미리네이다.
그의 손을 끌며 인도하는 것은 혼령을 저승에 인도하는 헤르메스이다. 그의 왼쪽에 3 사람의 남성이 새겨져 있는데, 이 3인의 남성은 유족인 아버지인지 형제인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이 사람들이 일단 작은 비례로 새겨져 있는 것도 사자(死者)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부조는 나폴리 그밖에 모각(模刻)이 있는 유명한「오르페우스·에우리디케의 부조」를 생각하게 한다. 제작 연대도 양식도 그 부조의 원작과 비슷하다고 보겠다. 여러 가지 문헌에 유실, 행방불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아름다운 레키 토스형 묘비를 미술관에서 보았을 때의 놀라움과 즐거움은 한이 없으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 아름다운 젊은이의 머리(頭部)는 이탈리아의 베네 벤트에서 출토되었다.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올림피아 경기의 승리자 상의 일부라고 추정되고 있다. 분명히는 알 수 없지만, 어느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우승자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청동으로 주조한 이 머리는 당대의 흔한 석조(石彫)에 비해 주목을 끌고 있다. 해상국(海上國)인 그리스는 B.C.6세기 전부터 지중해변(地中海邊)에 식민지(植民地)를 두고 있었다. B.C.6세기에는 세리누스의 여러 신전 건립(諸神殿建立)이 시작되었으며 또한 남이탈리아 파에스 툼의 포세이돈 신전은 B.C. 5세기에 축조되었다. 그리스의 신전 건축은 B.C. 7세기 전은 목조(木造)이며 이것이 석조(石造)로 진행된 경과를 보여 주는 유물(遺物)은, 그리스 본토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이탈리아에 남아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베네 벤트의 머리」도 B.C. 5 세기 후반의 청동 작품으로서 흥미가 있다. 대체로 고대 미술품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은 발굴이나 발견에 의해서 얻어지며, 새로운 발견이 그 이전의 학설을 번복하는 일도 이따금 있었다.
그리스 작품의 경우 발견된 석재 조각에 비해서 주조 조각(鑄造彫刻)은 훨씬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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