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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끝까지 와닿는 기다란 옷을 걸치고 있는 청년의 늠름한 모습이다. 이 젊은이의 상(像)과 더불어 말(馬)의 뒤쪽 다리(後足)나 말의 꼬리(尾) 그리고 전차(戰車)의 바퀴나 전차의 단편(斷片)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젊은이는 전차
(獸車、馬車) 경주(競走·競爭)의 우승자(優勝者)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이 젊은이의 상(像)은 전차 경쟁에서 우승한 기쁨에 넘친 승리자의 상인 것이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면, 첫째 옥안(玉眼)이 완전하고 뚜렷하여 씩씩한 기상을 엿볼 수 있으며, 둘째로 그의 표정은 우승의 영광에 상기된 긴장감을 느끼게 함과 아울러, 매우 용맹스러운 남자다운 힘을 과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진취적인 기상과 남자답게 약동하는 힘찬 그의 표정에서 그 경기의 긴장감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이 상(像)이 세워져 있는 밑의 대좌(臺座)에 새겨져 있는 명기(銘記)에서 B.C. 478년이나 B.C. 474년에 행해진 경기에서 시칠리아의 포류 자로스의 전차가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봉헌(奉獻)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델포이의 승리자」는 1896년에 아폴론 신전(神殿) 부근에서 발굴되었다. 이 젊은이의 상이야말로 승리자다운 용맹스러운 모습을 길이 후손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트로이의 왕자 가니메데스는 굉장한 미소년이었다.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본 제우스는 그 아름다움에 끌려 데려다 시동(侍童)으로 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올림피안에서 찾아낸 이 테라코타는 제우스가 가니메데스를 훔쳐 껴안고 하늘을 날아 올림포스로 돌아오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제우스의 목은 이미 1879년에 발굴했고 그 밖의 부분은 1939년, 42년, 52년 거의 만세기에 걸쳐 여기저기에서 발견된 조각들을 맞추어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복원한 것이 이 작품이다. 하마 티온을 걸친 제우스의 표정은 소원을 이루어 만족스럽기만 하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독수리로 변신하여 소년을 데려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작품은 남신(男神) 그대로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고, 소년도 싫어서 몸부림치는 표정은 아니다. 오히려 제우스에게서 선물을 받았는지 닭 한 마리를 들고 좋아하는 표정이다. 왼손에 지팡이를 들고 한 쪽 다리가 옷을 젖히고 튀어나올 만큼 큰 걸음으로 걷는 모습에서 마음이 급해진 제우즈의 심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B.C. 5세기 중엽 오랫동안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겨 낸 그리스는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을 만들어 결속하였다. 아테네의 수장 페리클레스(Pericles)는 그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또 문학, 예술을 크게 유흥시켜 클래식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전승의 기운을 타고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리스 정신을 유감없이 결속시킨 것이 파르테논 신전이다. 페리클레스는 파르테논 신전 재건과 아크로폴리스 성역 조성 사업을 아테네 태생의 대 조각가 피디아스(Pheidias)에게 맡겼다. 피디아스는 자신의 천재성과 전 그리이스인의 지혜를 모아 이 대사업을 완수했는데, 파르테논은 ‘펜 테리 콘 대리석에 결정된 그리스 정신’ ㅡ루낭-이며 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함' ㅡ르 코르뷔지에―이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서는 자는 ‘파르테논을 말하지 말고 파르테논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 -발레리-이다. 파르테논 본당(本堂) 바깥쪽 프리이즈(Frieze)에는 높이 105cm, 길이 163cm의 석면에 368명의 인물과 236마리의 동물이 새겨져, 판아테나이아의 마지막 전행사가 설명돼
어 있다. 이 부조는 선발된 아테네 귀족의 아가씨 6명이 신에게 키톤을 바치러 가는 행렬을 표현한 것이다. '자연주의는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지만, 또한 이상화한 고전미를 과시하고 자랑하기 가지에는 미치지 않는다. 조금 긴장된 얼굴이지만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매우 아름답다. 눈알(眼球)이 없어져서 눈알이 있었던 그 안쪽의 어두움이 속에서 내다보고 있기 때문에 한편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B.C. 5세기 후반이라고 하는 시대적인 탓도 있었을 게다. 머리 꼭대기에서 가지런히 나온 머리카락은 기다랗게 늘어져 있고, 두 귀 위의 머리카락만이 길게 묶어져 있는데, 왼쪽 귀는 노출되어 있으며 오른쪽 귀는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다. 머리 뒤쪽에 파손으로 인하여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으나, 이 이외의 보존 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며, 녹색의 파티나가 아름다운 채색을 지니고 있다. 머리(首)의 크기로 판단해 볼 때 전신은 실체보다 조금 컸을 것 같다. 키프로스 섬에서 출토되었으며, 전 소장자의 이름을 따서「차트와 아스의 머리」라고도 불리고 있는데, 근년(近年)에 와서야 박물관에 들어갔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이와 같은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낸 당시의 작가들이 대단히 우수한 예술성을 지녔었음에 대하여 머리를 수그리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보존이 잘 되어 온 것에 대하여 기쁨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루도비시의 옥좌」라 명명된 의자 모양의 이 작품은, 아프로디테의 탄생을 가운데로 하고, 양쪽 반 정도를 대리석 판으로 맞춘 것인데, 이것이 무엇인지 확실히는 모른다.이들 대리석판의 뒷면을 장식한 세 개의 부조는, 청초(淸楚)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매료한다. B.C.5세기 중엽의 그리스 원작으로 매우 진귀한 작품이다. 옥좌의 등받이에 해당되는 부분의 상단이 결손 되어 있어, 바다의 물거품에서 탄생하는 미의 여신을 좌우에서 돕고 있는 시(時)의 요정의 머리 부분이 없어졌다. 얼굴을 쳐들고 햇볕을 받는 아프로디테의 고아(高雅)한 표정을 맞는 두 사람의 얼굴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유감이지만, 이들 세 여성상의 짜임은 훌륭하다. 아프로디테의 포 공포 송환 두 발의 흐름과 대조적인 델리킷 한 살결, 어깨에서 가슴, 배로 매력 있는 기복을 보이면서 흘러내리는 옷 주름, 교차하는 세 여인의 팔이 보여 주는 젊음……………이런 것들이 가볍게 리듬을 치면서 전체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장식성이 강한 이오니아 전통이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 본토의 청결한 도덕성을 반영하면서, 아직 완전히 B.C.5세기 후반의 고전 양식으로 이행되지 않은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1888년 파르테논 남쪽 어느 건물의 벽에서 발굴되었으며 보존 상태는 극히 양호하다. 발견 당시에는 위쪽에 무늬, 비면의 바탕에 청색의 채색이 남아 있었다. 이 부조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임자(主)인 여신 아테나에 봉납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이 각기둥(角桂)의 해석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옛날에는 이것을 묘표(墓標)로 보고 ‘슬픔의 아테나’라고 해석했었으며, 다음으로 여신에게 대한 봉납품의 목록을 쓴 돌, 또는 키몬에 의하여 남쪽으로 확장된 아크로폴리스—즉 여신의 성역——의 경계석으로, 여신은 ‘만족한 듯’ 이를 가납(嘉納)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해석되어 왔다. 키몬의 남쪽 벽 구축은, 이 부조의 양식상의 연대와도 일치하여 뒤의 설에 유리하기는 하나, 그리스의 신이 지상의 실존 물과 더불어 표현되는 예를 달리 알지 못하여 여기에 난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각기둥(角柱)의 해석은 ‘슬프게 한다’ 든가 '만족한다’ 든가 하는 삽화적인 신의 자세의 표현은 아니며, 사려(思慮)와 예지(叡智)의 여신 아테나의 본성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일 거다. 이 익명의 거장——뮈론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은 아테나의 본성을 이처럼, 무기(武器)를 떠나서 깊이 생각(深思)하는 모습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 부조 앞에 서면 누구나 그 깊고 높은 신격(神格)을 느끼게 된다.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커다랗게 느껴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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