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고전적(klassisch)"이라는 말은 우리 귀에 어딘지 차갑게 들린다. 살아 있는 다채로운 세계를 벗어난 것, 따뜻한 붉은 피가 도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도식만이 존재하는 공기 없는 공간으로 밀려난 듯한 느낌이 든다. '고전 미술'이란 영원하나 죽은 것, 영원하나 낡은 것처럼 여겨진다. 학문의 열매나 학설의 산물이지 삶의 결실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에 반해 우리는 살아 있는 것, 현실적인 것, 잡을 수 있는 것을 무한히 갈망한다. 현대인이 어디서나 구하는 것은 흙냄새 물씬 풍기는 미술
이다. 우리 세대가 사랑하는 것은 15세기와 16세기가 아니다. 우리 세대는 현실적인 것에 대한 확고한 감각, 눈과 감각의 단순성을 사랑한다. 몇 가지 고대풍의 표현들은 덤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경탄하고 미소 짓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피렌체를 여행하는 사람은 다함이 없는 쾌적함을 지니고 옛 거장들의 그림에 빠져든다. 그 그림들은 우리가 피렌체 사람들이 산모(産母)를 방문하던 방, 그 옛날 도시의 작은 골목들과 광장들 한가운데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충실하고도 꾸밈없이 말해준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그림 속의 인물이 당장이라도 뛰쳐나와 아무렇지도 안은 듯이 우리를 바라볼 것만 같은 살아 있는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나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있는 기를란다요(Ghirlandajo, 1449~1494)의 그림들을 알 것이다. 그 그림들 속에 마리아와 요한의 이야기가 얼마나 유쾌하게 그려져 있는가. 시민적이지만 소시민적이지 않고, 풍부함과 다채로움, 값진 의상, 장식품과 부유한 건축물에 대한 건강한 기쁨을 지닌 채 축제일의 찬란함 속에서 삶이 빛난다. 바디아에 있는 필리피노 리피의 그림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있을까? 이 그림에서는 성모가 성 베르나르두스에게 나타나 가늘고 섬세한 손을 그의 책 속에 들이밀고 있다. 성모 마리아를 따라온 귀한 소녀 천사들이 기도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두 손을 모으긴 했지만, 부끄러워하면서도 호기심에 넘쳐 마리아의 치마 뒤로 몸을 숨긴 채 이 이상한 낯선 남자를 놀라서 바라보는 모습은 얼마나 자연의 향기를 풍기는가. 보티첼리의 마법 앞에 서면 라파엘로조차 옆으로 밀린다. 보티첼리 (Botticelli, 1445∼1510)의 감각적이고 우수에 찬 눈길을 한번 느껴본 사람이라면 라파엘로의 <세디아의 성모>를 보고 흥미를 느낄 수 있을까?
초기 르네상스란 다채로운 의상을 입은 가냘프고도 소녀 같은 모습들, 꽃이 피어나는 들판, 바람에 나부끼는 베일, 날씬한 기둥 위에 넓게 퍼진 아치들이 있는 넓은 홀들을 뜻한다. 또한 방금 성숙해져서 자기만의 방식과 힘을 갖게 된 시대가 지니는 다양성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소박한 자연과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동화 같은 화려함이 있다.
이 즐겁고도 다채로운 세계를 떠나 높고도 고요한 고전 미술(전성기 르네상스 미술. 16세기 : 옮긴이)의 홀에 들어서면 불신과 불쾌감이 생긴다. 이들은 대체 어떤 인간들일까? 고전 미술의 몸짓은 우리에게 낯설게 보인다. 우리는 심정적인 것, 소박하면서도 무의식적인 것을 그리워한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옛날부터 아는 사람처럼 친근하게 우리를 바라보지 않
는다. 가재도구들이 경쾌하게 늘어선 사람 사는 듯한 방들은 없고, 오로지 색깔 없는 벽과 거대하고 무거운 건축물만 보일 뿐이다.
오늘날 북부 유럽 사람이 <아테네 학당>이나 그 비슷한 예술작품을 마음의 준비 없이 갑자기 보게 된다면 당황하는 게 거의 자연스러울 정도이다. 누군가가 속으로, 어째서 라파엘로는 로마의 꽃시장이나 농부들이 일요일 아침에 몬타나라 광장에서 면도를 받는 모습 같은 명랑한 장면을 그리지 않았지?' 하고 묻는다 해도 나쁘게 생각되지 않는다. 고전 작품에
서는 현대의 예술적 기호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문제들이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목가적인 취향으로는 이런 형식의 예술작품을 높이 평가할 능력이 아예 처음부터 부족하다. 우리는 원시적인 단순성을 보고 좋아한다. 우리는 유치하면서도 소박하고 단단한 구조, 잘게 분할되고 호흡이 짧은 양식을 즐긴다. 그에 반해 예술성이 풍부하고 완벽함을 추구
하는 시대는 평가받지도 이해되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전제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경우에도, 또한 16세기 르네상스가 기독교 소재의 단순한 주제를 다룬 경우에도 대중은 여전히 냉담하다.
일반 대중은 고전 미술의 몸짓과 정신을 진짜라고 받아들여도 좋을지를 모른 채 불안감을 느낀다. 수많은 가짜 고전을 받아 삼킨 나머지, 위장이 거칠더라도 순수한 것을 애타게 바라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위대한 몸짓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약해지고 불신감을 품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온 세상에서 연극적인 꾸밈과 공허한 미사여구만 찾아
낸다.
저건 원작이 아냐하는 속삭임을 계속 듣다 보니 거리낌 없는 신뢰감이 완전히 흔들리게 되었다. '이건 고대에서 얻어온 거야, 오래전에 가라앉은 고대의 대리석 세계가 꽃피는 르네상스의 삶 위에 차가운 유령의 손길을 올려놓아 그만 죽게 만들고 말았어 하는 속삭임이다.
그러나 고전 미술은 15세기 르네상스의 자연스러운 계승이며 이탈리아 국민의 완전히 자유로운 자기표현일 뿐이다. 그것은 낯선 모범, 그러니까 고대를 모방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성장의 시간에 너른 들판에서 자유롭게 자라난 것이다.
우리 의식에는 이런 사정이 너무나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 고전주의에 대한 선입견일 것이다- 철저히 민중적으로 규정된 것을 보편적인 것이라 여기고, 특정한 토양과 특정한 하늘 아래서 생명력을 지닌 구조물을 전혀 다른 상황에서 되풀이하려고 한다.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미술은 어디까지나 이탈리아 미술이다. 여기서 현실을 '이상'으로 고양시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탈리아 현실의 고양인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타마리아 노벨라(피렌체) 성당에 가서 그가 그린 (0) | 2022.06.05 |
---|---|
14~15세기 르네상스 미술1 (0) | 2022.06.05 |
엘 그레코가 미술가로서 생애 처음으로 제작한 본격적인 작품 (0) | 2022.05.31 |
초라한 서민의 순박한 신앙심의 표상 (0) | 2022.05.31 |
그 원숙(圓熟)한 솜씨로 보아 (0) | 2022.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