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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미술의 시작에는 조토(Giotto, 1266~1337)가 있다. 그는 미술의 혀를 풀어준 사람이다. 그가 그린 것은 모두 말을 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들은 체험이 된다. 그는 인간 감성의 폭넓은 틀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성서 이야기와 성인(聖人)들의 전설을 들려주고, 어디서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건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사건의 핵심이 정확하게 파악되어 있고, 장면들은 실제로도 아마 그랬을 거라는 인상을 풍기면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조토는 종교적인 이야기들을 해석하고, 친근한 세부사항들을 첨가하는 정감 어린 방식을 받아들였다. 당시 사람들은 성 프란체스코 선교사들과 시인들에게서 그런 식의 이야기들을 듣곤 하였다.
조토 작품이 갖는 본질적인 업적은 시적인 창안에 있지 않고 회화적인 묘사에 있다. 그는 그때까지 아무도 그림 안에 넣을 수 없던 사물들을 눈에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현상에서 이야기를 보는 눈을 가졌다. 역사상 회화의 표현 한계가 이때보다 더 크게 확장된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조토를 기독교 낭만주의자의 방식에 따라서, 그가 마치 프란체스코 수도사의 심정 토로 책 (독일 낭만주의 작가 바켄로더 Wackenroder의 《예술을 사랑하는 수도사의 심정 토로》(1797)를 빗대어 말한 것 : 옮긴이) 호주머니에 지니고 다녔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이 지상에 천국을 끌어들여서 세상을 천국으로 만든 저 위대한 사랑의 숨결 아래서 그의 예술이 피어났다고 상상해서도 안 된다. 조토는 몽상가가 아니라 현실의 인간이었다. 서정시인이 아니고 관찰자였다. 흥분으로 감동시키는 표현은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표현이 풍부하고 명료하게 말을 하는 예술가였다.
그는 감정의 내면성과 정열적인 힘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뒤졌다. 조각가인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 1230~1314)는 좀 더 단단한 재료를 가지고도 화가인 조토보다 영혼을 더 많이 표현하였다. 14세기에 그려진 '수태를 알림' 가운데 조반니가 피스토이아 강단의 부조에 새겨 넣은 것보다 더 섬세한 것은 없다. 그가 만든 정열적인 장면들을 보면 단테의 뜨거운 숨결 같은 것이 느껴진다. 다만 그것이 그를 망치고 말았다. 그는 지나치게 표현에 빠져들었다. 지나친 감정 표현에 의하여 형식이 망가지면서 입체성이 사라지고 예술은 과도한 주정(情)주의에 빠졌다.
조토는 그보다 조용하고 냉정하며 균형이 잡혔다. 누구나 그의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섬세함보다 토종의 투박함이 그에게는 더 가까웠다. 언제나 진지하게 의미를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선이 아니라 명료함에서 효과를 얻으려 하였다. 당시 일반적인 양식인 선율적인 의상의 곡선 처리, 리듬 있고 활동적인 걸음걸이와 동작 등이 조토의 작품에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그를 조반니 피사노와 나란히 놓으면 무겁고, 피렌체 세례당의 청동문을 만든 안드레아 피사노(1270~1348)와 나란히 놓으면 추하게 보인다. 안드레아의 <성모의 방문> <성모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에서 두 여자가 서로 얼싸안고 하녀 하나가 그 옆에 서 있는 장면은 노래 내용과 똑같다.

조토의 선은 매우 딱딱하지만, 비상하게 표현력이 풍부하다. 그가 그린<성모의 방문>(파도바, 아레나 예배당)에서 몸을 굽히면서 마리아의 눈을 들여다보는 엘리사벳의 선은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안드레아 피사노의 경우 아름다운 파도와 곡선의 울림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
조토 예술의 절정은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그림들이다. 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초기 작업을 훨씬 넘어섰다. 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 의도만 따지자면 - 16세기의 거장들에 비할 만한 효과를 겨냥하고 있다. 그의 직계 제자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단순화와 집중을 포기하고 풍부함과 다양성만 원하였다. 더욱 깊이를 가져야 할 자리에서 그림들은 혼란스럽고 불안정해졌다. 그러다가 15세기 초에 새로운 화가가 등장하여 강력한 일격으로 사물을 원상복귀시키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림으로 붙잡았다. 그가 바로 마사초(Masaccio, 1401~1428)였다.
피렌체에서는 조토에 이어 놓치지 말고 마사초를 보아야 한다. 그들의 차이점을 극히 날카롭게 의식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둘의 거리는 어마어마하다.

베로키오,다윗


바사리 (Vasari, 1511~1574) 는 마사초에 대해 통속적으로 들리는 말 한마디를 하였다. 그러니까 마사초는 그림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조토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은가 하고 물을 수 있다. 물론 이 말에는 더욱 깊은 의미가 담겼다. 지금 우리에게는 극히 당연한 것, 즉 그림은 현실의 인상을 재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이런 요청을 전혀 모르던 시절도 있었다. 평면 위에 공간적 현실을 재현하는 일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은 아니다. 중세는 그 긴 세월 내내 사물을 보여주고, 공간에서의 사물의 상태를 보여주는 묘사만으로 만족하였으며, 자연과 비교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중세의 그림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환각기법 효과로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사람들이 이런 제한을 오히려 장점으로 느끼고, 수단이 완전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자연의 인상과 비슷하게 보이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게 된 것은 인류의 가장 큰 발전 가운데 하나였다. 혼자서는 그런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낼 수 없었다. 한 세대만으로도 불가능하였다. 조토가 많은 일을 했지만, 마사초가 처음으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것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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