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강력한 계곡의 물길처럼 수태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황폐하게도 만들면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현상은 이탈리아 미술에 거대한 영향을 남겼다. 저항할 수 없는 인상으로 모두를 함께 휘몰아 가면서 그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해방자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는 파괴자였다.
첫 순간부터 미켈란젤로는 이미 개성이 완성되었다. 이 개성의 일방성은 거의 공포스러울 정도이다. 그는 조각가로서, 그리고 오로지 조각가로서만 세계를 파악하였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확고한 형식이며, 인체만이 묘사할 가치가 있는 것이 여겼다. 사물의 다양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 인류란 수많은 개체로 다양하게 구분되는 지상의 인간들이 아니라 하나의 종족, 승화된 종류의 강력한 종족이었다.
레오나르도의 기쁨과 나란히 놓고 보면 그는 고독한 사람이었고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그에게 아무것도 선물해주지 못하였다. 그는 이브를 풍요로운 자연의 온갖 광채 속에 있는 여자를 한 번 그린 적이 있다. 한순간 무심하고 부드러운 아름다움의 모습을 붙잡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순간일 뿐이었다. 그가 원했건 아니건 그가 만들어낸 것은 쓰라린 고통에 찌든 것이었다.
느슨하게 벌여놓은 순간적인 윤곽 스케치는 그와 맞지 않았다. 긴밀한 배 그의 양식은 뭉쳐진 것, 큰 덩어리를 이루어 완결된 것을 지향하였다.
그가 가진 형식 파악의 능력과 내적인 표상의 명료함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표현을 찾기 위해 더듬거리나 모색하지 않았다. 최초의 선으로 그는 벌써 확고한 표현을 만들어냈다. 그의 드로잉들은 사물을 꿰뚫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형식으로 완전히 터질 듯하다.
내적인 구조와 운동의 역학은 마지막 한 올까지도 완전히 표현으로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관객에게 함께 체험하도록 강요한다.
그런데도 특이한 점은 모든 뒤틀림, 관절의 구부림이 숨은 힘을 가진다는 것이다. 아주 살짝 밀어낸 것이 상상할 수 없는 강력함으로 작용하고, 이런 인상이 너무나도 커서 움직임의 동기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방식에는 가능한 최종 효과에 이르기까지 수단을 가차 없이 몰아붙이는 특성이 있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효과들로 예술을 풍성하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술에서 단순하고 일상적인 것을 향한 즐거움을 빼앗음으로써 그것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부조화(不調和)의 요소를 르네상스 안으로 도입한 사람도 그였다. 의도적으로 부조화를 도입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양식, 곧 바로크 양식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에 관해서는 뒤에 나오는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의 생애의 전반기(1520년까지)에 나온 작품들은 아직 전혀 다른, 초기의 언어를 말하였다.
미켈란젤로의 의도를 판단할 수 있는 최초의 위대한 작품은 <피에타(Pietá,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고 슬픔에 빠진 성모)>이다. <피에타>는 지금 성 베드로 성당의 한쪽 제단에 야만적인 방식으로 전시되어 있다. 세부적인 기술의 섬세함도 움직임의 매력도 그 본래의 효과를 발휘할 수 없는 자리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이 그룹 조각상은 큰 공간에서 본래의 힘을 잃었으며, 게다가 높이 올려지기까지 해서 관찰 지점도 적절하지 못하다.
대리석으로 된 실물 크기의 두 인체를 하나의 그룹으로 만들어낸 것 자체가 이미 새로운 것이며, 앉아 있는 여자가 다 자란 남자의 몸을 무릎에 안은 자세를 표현하는 것 또한 극단적으로 어려운 과제였다. 이럴 경우 전체를 절단하는 단단한 수평선과 무미건조한 오른쪽 각도가 예상된다. 미켈란젤로는 당시 아무도 하지 못했을 일을 해냈다. 몸을 비튼 것과 돌리는 것만으로 두 신체는 무리 없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성모 마리아는 시신을 붙잡고 있지만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시신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완전히 늘어져 있으며, 선 하나하나는 아주 탁월한 표현력을 지닌다. 위로 들어 올려진 어깨와 뒤로 늘어진 머리는 죽은 사람이 엄청난 수난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마리아의 몸짓은 더욱 놀랍다. 그 이전의 사람들은 눈물에 젖은 얼굴이나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 기운을 잃고 쓰러진 모습 등을 보여주었다. 미켈란젤로는 '신의 어머니는 지상의 어머니처럼 울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있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는 움직임이 없고 오직 내려뜨려진 왼손만이 말을 하고 있다. 절반쯤 벌린 손은 말없는 고통의 독백을 따라가는 중이다.
그것은 16세기의 감정이다. 그리스도도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15세기의 피렌체 양식에서 나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의 머리는 다른 어떤 머리와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이전의 피렌체 사람들이 사랑했던 가늘고 섬세한 유형이다.
두 신체도 마찬가지다. 몇 년 뒤 미켈란젤로는 더 넓고 강력한 육체를 묘사하게 된다. 그리고 아마 뒷날의 그라면 이 그룹 조각상의 결합이 너무 우아하고 너무 뻔하며 너무 느슨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시체가 더 무겁게 조형된다면 무게가 훨씬 더 나갈 것이고, 선들은 이렇듯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두 인물을 훨씬 더 긴밀한 덩어리로 뭉쳐놓았을 것이다.
의상 부분은 약간 지나치게 풍성하다. 밝은 주름의 돌출부와 깊고도 그늘지게 겹친 부분들은 16세기 조각가들이 모범이 삼았던 것이다. 뒷날에도 그렇지만 대리석은 강력하게 연마되어서 대단히 반짝이는 광채를 드러낸다. 도금의 흔적은 전혀 없다.
<브뤼허의 성모>의 앉은 자세는 <피에타>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 작품은 완성된 뒤 나라 밖으로 나가서 이탈리아에는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물론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이 조각상은 분명히 이곳에서 가장 심각한 영향을 남겼을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앉아 있는 성모는 제단화에서 수없이 변화를 겪은 주제이다. 그렇지만 피렌체에서는 조각 작품에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대리석보다는 오히려 점토(테라코타)로 만들어진 작품을 더 자주 접하게 되는데, 이때 점토 작품은 그 자체로 매력이 없는 까닭에 아주 세밀하게 채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점토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기념비적인 특성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돌로 된 작품만 좋아하였다. 롬바르디아 지역처럼 점토 작업이 계속되는 경우에도 다채로운 채색만은 사라졌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에서 아이를 어머니의 품에서 떼어내 이미 상당한 크기와 힘을 지닌 형태로 어머니의 두 무릎 사이에 세워놓음으로써 그 이전의 모든 형태를 완전히 넘어선다. 서서 움직이는 아이라는 모티프를 이용해서 그는 이 그룹 조각상에 새로운 형식 내용을 부여하였다. 앉아있는 성모의 두 발의 높이가 같지 않음을 통해서 현상 방식의 풍부함을
높였다는 사실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이는 아이다운 놀이에 빠져 있지만, 그래도 역시 대단히 심각하다.
그 이전의 작품에서 축복의 표지를 보낼 때보다도 오히려 더욱 심각하다.
성모도 마찬가지로 깊은 생각에 잠겨서 침묵하고 있다. 그녀에게 감히 말을 걸 수 없다. 무겁고 거의 장엄한 진지함이 이 두 사람 위에 놓여 있다.
성인에 대한 새로운 경건함과 수줍음을 띤 이 모습은, 베를린 박물관에 있는 베네데토 다 마야 노의 점토 그룹 상처럼 완전히 15세기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는 조각상과 비교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그냥 선량한 아무개 부인이다. 어디에선가 이 본 듯한 모습이고, 친절하게 집안을 경영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아이는 사랑스러운 귀염둥이로 작은 손을 들어 올려 축복의 손짓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여기 이 두 얼굴을 빛나게 만들며 수다스러운 눈길에서 뿜어져 나오는 즐거움이 미켈란젤로에게는 전혀 없다. 그의 작품에서는 머리도 보통의 부인과 다르다. 의상도 세속적인 화려함이나 값진 것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새로운 미술의 정신이 절제된 조화를 이루면서 강력하고도 고귀한 모습으로 이 <브뤼허의 성모>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 머리 자세가 보여주는 수직 구성의 특성만 해도 위대성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15세기의 요소를 완전히 넘어서는 모티프라고 말할 수 있다.
아주 초기의 작품인 <계단의 성모>라는 작은 부조에서 미켈란젤로는 그와 비슷한 생각을 붙잡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아이가 품속에 잠들어 있는데 성모가 멀리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을 포착하였다. 아직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은 드로잉에서도 아주 특이한 의도가 밖으로 내비치고 있다.
그리고 표현의 능력을 완전히 갖춘 상태에서 그는 한번 더 부조 작품에서 동일한 모티프로 돌아갔다. 그것은 (미완성인) 바르젤로의 원형 부조(톤도)이다. 아이는 피곤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어머니에게 기대어 있고 성모 마리아는 얼굴 전체를 보이면서 예언자처럼 그림의 표면을 벗어나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이 부조는 다른 측면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여성적인 아름다움의 새로운 이상(理想)이 드러나 있다. 옛날 피렌체의 우아함을 완전히 없애버린 강력한 유형의 여성이 나타난다. 커다란 눈, 넓은 두 뺨, 강한 턱, 의상의 새로움도 함께 나타난다. 목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니 구조적으로 중요한 연결점들을 살펴보라. 두 신체를 빡빡하게 가장자리에 닿도록 하는 새로운 방식의 공간 활용을 통해서 힘의 인상이 뒷받침된다. 안토니오 로셀리노의 번쩍이는 풍부함, 강력한 돌출부부터 가볍게 흔들리는 바닥까지 밝음과 어둠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그 풍부함을 포기하고 멀리 작용하는 몇 개의 악센트만을 남겼다. 다시금 머리 자세의 강력한 수직선이 그림의 주음(音)으로 울려 나온다.
피렌체의 부조는 런던에 형제 하나를 두었다. 그것은 가장 매 혹적인 발상과 미켈란젤로에게서는 아주 드물게 노출되는 충족된 아름다움의 장면을 보여준다(로열 아카데미), 그와 나란히 놓고 보면 기쁨 없는 <성 가족>은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는
가. 그리고 긴 전통을 이룬 15세기 성 가족의 그림들과는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것인가! 성모는 강력한 골격을 가진 남성적 여성이다. 팔과 발이 드러나 있다. 다리를 꺾은 모습으로 그녀는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 어깨 위로 뒤쪽에 앉은 요셉이 넘겨주는 아이를 잡고 있다. 모습들이 뒤엉킨 채 이상하게 한데 어우러진 동작이다. 모성적인 성모나(미켈란젤로에게는 이런 성모가 없다) 화려한 성모가 아니라 여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주제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 너무나 강한 모순이 드러나 있어서 관객은 이것이 흥미로운 동작을 표현하고, 구성상의 특별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진 작품이라는 사실을 즉시 알아채지 못한다.
이 그림은 개인 후원자에게서 주문을 받은 것이다. 바사리는 주문자 (안젤로 도니 Angelo Doni)가 이 작품을 받으면서 힘들어했다는 일화를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피티 궁전에 있는 그의 초상화를 보면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art pour l'art)'이라는 새로운 이상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미술적인 문제는 상당히 분명하다. 어떻게 가장 좁은 공간에 가능한 한 큰 동작 내용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입체적 풍부함을 집중시키는 것이 이 그림의 의도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으로 레오나르도를 능가하려는 생각을 품은 일종의 경쟁적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레오나르도의 <성 안 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를 위한 밑그림이 새로운 방식으로 인물들을 서로 밀착시켜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안나 대신에 요셉을 취했고 그밖에는 동일한 기술적 문제를 다루었다. 두 어른과 한 아기가 최대한 가까이 붙어 있는데도 불분명하거나 억눌린 느낌이 전혀 없다. 분명히 미켈란젤로는 축이 많다
선과 입체감은 금속적인 명료함을 띠고 있다. 이것은 이미 그림이 아니라 그림으로 그려진 조각품이다. 조각적인 관찰 방식은 예로부터 피렌체 사람들의 강점이었다. 그들은 회화가 아니라 조각의 사람들이다. 여기서 이런 민족적인 재능은 '좋은 드로잉'의 본질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얻는 높이까지 올라갔다. 레오나르도 라 하더라도 성모의 가로지르는 팔을 이와 비슷하게 만들지 못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모든 관절과 근육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묘사되어 있다. 어깨선까지 팔이 노출된 것은 공연히 그런 것이 아니다.
날카로운 윤곽과 아주 명료한 그림자를 지닌 이 그림의 인상은 피렌체에서 다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도안의 나라에서는 회화에 치중한 반계몽 주의자들에 대한 반대가 끊임없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브론치노(Bronzino)와 바사리는 이 점에서 미켈란젤로의 직접적인 후계자이다. 물론 그들 중 누구도 그가 가진 표현력 풍부한 형식화의 능력을 멀찍이도 따라가지는 못했다.
<피에타>와 <브뤼허의 성모>, <성모자> 부조와 원형 우리는 기대감에 넘쳐서 미켈란젤로의 젊은 시절에 나온 작품들이 또 있을까 둘러보게 된다. 그가 가장 개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분야이다. 그는 거대한 <헤라클레스>상으로 시작을 하였지만 이 작품은 오늘날 사라졌다. 그다음에는 로마에서 <피에타>와 같은 시기에 <바쿠스>(바르젤로)를 제작하고, 곧 이어서 그 모든 것을 넘어 명성을 가져다 준 피렌체의 다윗상을 만들었다.
<바쿠스>와 <다윗>에서는 15세기 피렌체 자연주의 최후의 표현을 알아볼 수 있다. 바쿠스를 취해서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묘사하겠다는 생각은 아직도 도나텔로의 발상에 머무른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술꾼이 발 밑이 흔들리고, 가득 채워진 술잔을 높이 쳐든 채 게슴츠레한 눈길로 어린 시종에게 의지하고 있는 순간을 붙잡았다. 그는 통통한 젊은이를 모델로 삼아 가장 큰 기쁨으로 개인의 특성과 거의 여자처럼 부드러운 신체를 만들어냈다.
그는 뒷날 다시는 이런 기쁨을 갖지 못했다. 모티프와 작업 방식 모두 철저히 15세 기적이다. 이 <바쿠스>는 유쾌한 인물상은 아니며 누구라도 그것을 보고 웃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에는 한 조각 젊은 기분이 숨어 있다. 미켈란젤로가 도대체 젊은 시절이 있었다면 말이지만, <다윗은 모습의 기묘함으로 인해서 <바쿠스>보다 더욱 이상한 작품이다. 다윗은 아름답고 젊은 승리자의 상이다. 도나텔로도 다윗을 강한 소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취향은 전혀 달랐지만 베로키오도 다윗을 날씬하고 섬세한 소년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미켈란젤로는 청춘의 아름다움에 대해 무엇을 자신의 이상형으로 보여주는가
미켈란젤로의 현실감이 한 번은 완전한 만족을 얻어야 했다. 그는 어떤 결과가 생기더라도 두려워 물러서지 않고, 심지어 이 꼴사나운 모델을 거대한 모습으로 확대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기묘한 움직임의 리듬이 생겨나고 두 다리 사이에 거대한 빈 삼각형이 생겨났다.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내기 위한 타협 같은 것은 없다. 이 청년상은 자연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이런 크기로 볼 때 그것은 거의 경이로움의 한계에 닿는 일이다. 그것은 모든 세부 선들이 놀랍고, 전체적으로 신체의 탄력성을 통해서 거듭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다만 아주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그것은 아주 추한 모습이다."
게다가 더욱 특이한 것은 이 <다윗상이 피렌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조각품이 되었다는 점이다. 피렌체 사람들 속에는 특별한 토스카나 식 우아함과 나란히 - 그것은 분명 로마의 장중함과는 다르다 표현력 풍부한 추함에 대한 감각이 숨어 있었다. 이 감각은 15세기가 끝났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 전에 사람들이 <다윗>상을 보호하려고 원래 세워져 있던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에서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길 때 하다
못해 청동으로라도 이 '거인' 상을 사람들 눈에 보이게 만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청동상은 아주 불행한 방식으로 전시되었는데, 그것은 현대의 양식 없음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청동상을 거대한 노천 테라스 한가운데에 얼굴보다 먼저 가장 끔찍한 모습부터 보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세웠다.
이 상이 완성된 직후 한동안 그것을 어디에 세워야 할까 하는 문제를 놓고 예술가들이 토의했다. 이 모임의 기록은 아직도 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은 이 작품이 어떤 벽면을 배경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란치 회랑(Loggia dei Lanzi)이나 시청사(Palazzo della Signoria) 문 옆 같은 곳 말이다. 이 조각상은 그런 자리를 요구하였다. 이 작품은 철저히 평면적으로 작업이 되어 사방에서 관찰하기에 적절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심을 잡고 전시를 해도 추한 요소가 더욱 강조된다는 한 가지 효과만 성취될 따름이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뒷날 자신의 <다윗>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와 비슷하게 세분화된 모델의 연구가 다시는 그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는 점을 빼더라도 그는 이 모티프가 너무 공허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경에 있는 사랑스러운 작은 사원 (0) | 2022.06.19 |
---|---|
마리아의 결혼식 (0) | 2022.06.18 |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 (0) | 2022.06.11 |
모나리자 (0) | 2022.06.10 |
이런 고귀함은 16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의 공동 재산이다. (0) | 2022.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