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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와 나란히 이탈리아 미술 전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이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표현력이 풍부해서 누구에게나 깊은 인상을 준다. 기다란 식탁 한가운데 그리스도가 앉아 있고, 제자들이 양쪽으로 균형 있게 앉았다. 그는 방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신하리라!'라고 말한 참이다. 생각지도 못한 이런
말이 이 모임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스도 혼자만 조용히 앉아 눈을 내리깔고서 침묵으로 같은 설명을 되풀이한다. '그렇다. 사정이 바뀌지 않는다. 나를 배신할 사람이 너희 중에 있다. 이 이야기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다. 단순함은 가장 높은 예술의 승리다.
그보다 이전 단계인 15세기를 돌아보면, 약 15년 전인 1480년에 제작된 오니산티에 있는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이 그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기를란다요의 가장 훌륭한 작품의 하나인 이 그림은 전형적인 옛날의 구성 요소들을 포함한다. 그의 구도는 그대로 레오나르도에게 전승되었다. 식탁은 양쪽 끝 부분이 앞으로 꺾였다. 유다는 홀로 앞쪽에 앉아 있다. 다른 열두 명은 뒤쪽에 있는데, 그중 어린 요한은 그리스도 옆에서 팔을 식탁에 올리고 잠들어 있다. 그리스도는 오른손을 쳐들고 있다. 그러니까 말씀 중이다. 배신자에 대한 말은 이미 해버린 것이 분명하다. 제자들이 근심에 찬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각기 자신의 무죄를 맹세하고 유다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우선 두 가지 점에서 전통과 단절하였다. 그는 유다를 고립시키지 않고 다른 제자들 사이에 앉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린 요한이 그리스도의 품에 잠들어 누워 있는 모티프를 없앴다. 그런 자세는 대단히 불편한 앉음새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장면을 더 균일하게 만들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양편에 좌우 대칭으로 나뉘어 앉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건축적인 배치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나아가 오른편과 왼편에 각각 세 사람씩 작은 그룹을 배치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는 다른 누구와도 달리 정확하게 중심인물이 되었다.
기를란다요의 모임은 중심점이 없다. 다소 독립적인 상반신 인물상들이 서로 나란히 두 개의 커다란 수평선, 곧 식탁과 뒷벽 사이에 끼여 앉아있다. 뒷벽의 벽 장식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무겁게 놓였다. 불행하게도 천장 아치의 버팀대가 벽의 중앙에 자리잡았다. 기를란다요는 이것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태연하게 그리스도를 살짝 옆으로 밀어냈는데, 그는 그것을 당혹스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중심인물을 부각하는 것을 언제나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그런 버팀대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배경을 만들면서 그것을 자기 목적에 맞는 새로운 보조 수단으로 삼았다.
그리스도가 뒷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앉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두 개의 수평선이라는 틀을 깨뜨린다. 자연스러운 식탁의 선은 유지하지만 위쪽은 전체 그룹의 윤곽을 위해 틔어 있어야 한다. 효과를 계산하는 아주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었다. 방의 전체적 조망, 벽의 모습과 장식들이 인물의 효과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모든 것은 신체를 더욱 크고도 입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배치되어야 한다. 그래서 방이 깊어지고, 벽은 여러 개의 벽걸이 장식으로 분할된다. 이런 중첩은 입체의 환각을 도와주고, 수직선이 되풀이되면서 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퍼져 나오는 방향에 악센트를 준다. 그것들은 순전히 작은 평면과 선들이기에 인물상에 진지하게 대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볼 수 있다. 반면에 기를란다요등 그 이전 세대의 화가들은 배경에 커다란 아치들을 그려 넣어 미리 하나의 척도를 제시한 셈이고, 그 척도에 비하면 인물들이 작아 보일 수밖에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레오나르도는 단 하나의 선만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피할 수 없는 식탁의 선이었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새로운 것이었다. 앞쪽으로 꺾인 탁자 끝 부분을 없앤 것은 말하지 않겠다. 어차피 그가 처음으로 그렇게 한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점은 효과를 높이기 위해 불가능한 것을 도입한 용기다. 레오나르도의 식탁은 너무나 작다 식기들을 헤아려보면 사람들이 모두 거기 앉는 것이 불가능하다. 레오나르도는 제자들이 기다란 식탁에서 존재감을 잃어버리는 것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인물들의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아무도 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야 비로소 인물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뭉치고 중심 인물과 적절한 교류를 갖도록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것은 대체 어떤 그룹들인가! 그 움직임은 어떤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번개처럼 그들에게 내렸다. 감정의 폭풍이 사방에서 터져 나온다. 사도들은 품위를 잃지는 않았지만 가장 거룩한 것을 빼앗길 운명에 처한 몸짓을 하고 있다. 완전히 새로운 표현의 강력한 총합이 여기서 미술 안에 도입되었다. 레오나르도가 선배들과 접합되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에 보지 못한 표현의 집중력이 나타난다. 이 집중력은 그의 인물들을 비할 바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도록 해준다. 그런 힘들이 행동을 개시하면 당연히 이전 예술의 오락적이고 부수적인 요소들은 없어진다. 기를란다요는 그림을 구석구석 자세히 들여다보는 관객을 계산하고 특이한 정원 식물, 새들과 다른 동물들로 관객에게 서비스하고 있다. 식탁의 식기를 정성 들여 묘사하고 식탁에 앉은 모든 사람에게 각각 얼마씩의 버찌를 분배해주었다. 레오나르도는 꼭 필요한 것만을 표현하였다. 그는 그림의 극적인 긴장감으로 해서 관객이 그런 부수적인 즐거움을 얻으려고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만했다. 뒷사람들은 그보다 더욱 간결성을 추구하였다.
인물들을 모티프에 따라 상세히 묘사하는 것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역할 분배에 나타난 경제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가장자리의 인물들은 조용하다. 두 옆얼굴이 전체를 하나로 감싼다.
상당히 수직적인 모습이다. 그들의 조용함은 그 옆자리에서도 유지된다.
그런 다음 움직임이 나타나서 주님의 양편에 있는 그룹들에서는 상당히 고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왼편에 앉은 제자는 팔을 크게 벌렸다. "마치 자기 앞에 갑작스럽게 심연이 열리는 것을 보는 것처럼."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른편에 앉은 유다는 더욱 과격한 움직임으로 뒤로 주춤하고 있다. 가장 날카로운 대립이 한 자리에 모였다. 요한은 유다와 같은 그룹 안에 있다.
이 그룹들은 얼마나 대조적으로 구성되었으며, 또 서로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한 편은 앞쪽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고, 다른 편은 뒤쪽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관찰에 거듭 사로잡히게 된다. 언뜻 보아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 뒤에 얼마나 많은 계산이 숨어 있는가. 그런데도 이것들은 주요 인물에게 할당된 큰 효과에 비하면 오로지 부수적인 중요성만 가지는 요소들이다. 소동 한가운데서 그리스도는 아주 조용하다. 두 손은 무심하게 벌리고 할 말은 이미 다해버린 사람 같다. 그 이전의 그림들의 경우와는 달리 여기서 그리스도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눈을 올려 뜨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침묵은 말보다 더욱 웅변적이다.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무시무시한 침묵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짓과 모습에는 고요하고도 위대한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귀족적이라 부를 만한 요소이다. 귀족적이라는 말과 고귀하다는 말이 같은 뜻으로 느껴지는 한에서 하는 말이다. 이 말은 15세기의 어떤 화가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을 탐구하기라도 한 듯하다. 그가 손수 이런 인간 유형을 만들어낸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본성에서 가장 좋은 부분을 여기 내놓았다.
물론 이런 고귀함은 16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의 공동 재산이다. 도이치 사람들은 이 손동작의 마법을 홀바인(Holbein) 덕이라고 끌어다 대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그 이전의 그림들에 비해서 완전히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그 몸짓과 모습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오히려 그림 전체에서 그가 차지하는 역할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전의 작품들에는 장면의 통일성이 없었다. 그리스도가 말을 하는 동안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그림이 배신을 알리는 장면인지 아니면 만찬 장면인지 언제나 명백하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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