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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말고 루브르에서 볼 수 있는 레오나르도의 또 다른 그림인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는 관객의 주목을 덜 끈다. 그의 손으로 완성되지 않은 이 그림은 색채도 실패했고, 도안의 가치 또한 오늘날의 눈으로는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할뿐더러 거의 감지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의 시대(1501년) 피렌체에서는 단순한 판지 그림만으로도 벌써 엄청난 놀라움을 불러일으켜서 레오나르도의 새로운 기적의 작품을 구경하기 위해 아눈치아타 수도원으로 사람들이 줄을 지어 몰려들었다. 이 주제는 전혀 생산성이 없었다. 옛날 화가들이 그린 우습게 한데 뒤엉킨 그림을 생각해보라. 세 인물이 각기 다른 사람의 무릎에 앉아서 점차 앞쪽으로 튀어나온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미건조하게 서로 뒤엉킨 모습이 극히 풍요로운 특성을 가진 그룹으로 변화되었다. 생기 없는 구조는 순수한 움직임 속에 녹아들었다.
성모 마리아는 어머니의 무릎에 비스듬히 앉아 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몸을 굽혀 두 손으로 아기를 붙잡는다. 아기는 그녀의 발치에서 어린양에 올라타려고 한다. 그래서 발을 모으고 있는 짐승의 머리를 꼭 붙잡고 한쪽 발은 벌써 등에 올려놓은 채 질문하는 듯 어머니를 돌아본다. (소녀 같은 할머니도 미소를 지으며 이 대담한 놀이를 지켜본다. <최후의 만찬>의 그룹들이 지닌 문제점들이 여기서 이어지고 있다. 구성은 대단히 자극적이다. 좁은 공간에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모든 인물든 대조적으로 움직이며 대립하는 방향들이 모아져서 완결된 형태가 된다. 전체가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는 것 볼 수 있다. 그것은 바위동굴 속의 성모>에서 이미 보았던 노력의 결실이다. 즉 전체가 단순한 기하학적 형식에 맞추어져 있다. 이 그림의 잘 억제된 풍부함과 비교해보면 〈바위동굴 속의 성모>는 얼마나 산만한가! 레오나르도가 점점 더 작은 공간에 점점 더 많은 동작 내용을 담으려고 한 것은 한낱 기교 부리기는 아니었다. 인상의 강렬함도 같은 강도로 커지기 때문이다. 전체 모습의 명료함과 평온함이 해를 입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보다 능력이 모자라는 모방자가 걸려 넘어지는 돌이다. 레오나르도는 완벽한 정도에 도달하였으며, 핵심 모티프가 되는 성모의 굽힌 자세는 넉넉한 아름다움과 따뜻함으로 성취되었다.


15세기가 그 앞에 멈추어 서곤 했던 온갖 부수적인 장식성들이 전례 없는 표현 능력 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없다. 여기서 - 어두운 배경 위에 밝은 색으로 어깨와 머리의 선들이 놀랍게 녹아들면서도 두드러지게 보이는 이 상황을 하나하나 눈앞에 그려 보라. 얼마나 고요하고, 그러면서도 얼마나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는가! 뒤로 물러나 있는 성 안나(성모의 어머니 : 옮긴이) 안에 아주 유리한 대립이 들어 있다. 아래쪽에서 뒤를 돌아보는 아기의 모습은 어린양과 한데 어울려 이 그룹을 아주 행복하게 마무리한다. 마드리드에 있는 라파엘로의 작은 그림 하나가 이 구도의 인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젊은 시절 피렌체에서 비슷한 문제에 도전하였다. 그는 안나 대신 요셉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어린양 만 해도 얼마나 나무토막 같은지 라파엘로는 동물을 잘 그리지 못했다. 그에 반해 레오나르도는 무엇이든 잡기만 하면 아주 잘 해냈다. 라파엘로보다 강한 사람이 당시 레오나르도를 향하여 도전해 왔다. 미켈란젤로였다. 그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하기로 한다. <바위동굴 속의 성모>에 나오는 풀과 꽃들과 잔잔한 물의 반사를 여기서는 볼 수 없다. 인물이 전부다. 그들은 실물 크기다. 하지만 절대적 척도로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간에 대한 인물의 관계이다. 인물들은 전보다 더욱 강력하게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혹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여기서 그림의 내용에 비해 그림의 표면이 충분히 크지 못하다. 그것은 16세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비례 관계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준 인상에 대해서는, 1501년 4월 3일 자로 피에로 디 노벨라라 수도사가 만토바의 변경 방백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다. 이 편지에서 레오나르도가 판지에 그린 밑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인물들은 실물 크기입니다. 그러나 상당히 작은 판지 위에서 그들 모두 앉거나 아니면 앞으로 몸을 굽히고 있으며 각기 다른 사람의 앞쪽에 위치합니다.
또 런던의 로열 아카데미에 소장된 두 여인과 두 어린이가 있는 그룹은 이와 같은 아름다움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아마도 그보다 이전 시기의 덜 유연한 구성을 보인다. 레오나르도 파에게 이 그림이 영향을 미친 것은 아마도 루이니 (암브로시아나 박물관)에게서 볼 수 있을 듯하다.

피렌체 정부 청사의 대회의실에 걸기 위해 주문을 받은 전투 그림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것이 없다. 밑그림도 없이 오직 뒷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불완전하게 복사된 것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이 작품에 나타난 문제 제기가 너무나 흥미롭다. 레오나르도는 말들을 매우 깊이 탐구하였다. 16세기 화가들 가운데 가장 많이 탐구한 사람이다. 그는 이 동물과 친근한 교류를 가져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밀라노에서 그는 여러 해 동안이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공작의 기마상을 제작하는 데 힘을 쏟았다. 기마상은 직접 주조되지는 않았지만 주조를 위한 모델은 완성되었다. 그것이 망가진 것은 미술사상 가장 큰 손실에 속한다. 아마도 베로키오의 <콜레오니> 기마상을 움직임이라는 측면에서 능가하려는 것이 처음 제작 동기인 듯하다. 그는 갤 럼으로 달리면서 쓰러진 적을 짓밟는 말의 여러 가지 모습을 완성하였다. 그것은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Antonio Pollaiuolo, 1432~1498)도 가졌던 생각이다. 
레오나르도의 조각상이 지나치게 회화적인 모습이 되었으리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여기저기서 듣게 되는데, 그 말이 맞다 해도 그것은 오로지 구상 자체에만 해당된다. 뛰어오르는 말이라는 모티프에서 그 어떤 정적인 것을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업이 진행되면서 이미 <최후의 만찬>에서도 관찰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전체를 통합하는 단순화 효과가 반영되었던 듯하다. 레오나르도는 마지막에 말을 단순히 걷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처음 구상에서는 강렬하게 반대 방향을 잡았던 사람과 동물의 머리 방향이 상당히 완곡하게 바뀌었다. 다만 지휘봉을 든 팔이 뒤쪽으로 향한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을 통해 레오나르도는 전체 윤곽을 풍부하게 하고 기수 오른쪽 뒤의 비어 있는 구석을 채우려고 하였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의 탐색을 적용하려고 했던, 피렌체 대회의 실의 대규모 전투 그림에 관해서는 루브르에 남아 있는 루벤스(Rubens)가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드로잉이 유일한 출전이다. 이 드로잉은 우리에게 실물을 상상해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잘 알려진 일이지만 에델 링크는 그것을 보고 탁월한 동판화를 제작하였다. 이 드로잉이 원래 그림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보여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바사리에게서 읽을 수 있는 묘사와 대체로 일치한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사람들에게 말을 그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려고 생각하였다. 그는 전투 도중 기사의 행동을 주요 모티프로 잡았다. 전쟁은 기(旗)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말 네 마리와 기사 넷이 정열적인 흥분에 휩싸여서 격렬히 맞붙고 있다. 극단적으로 입체적인 그룹화의 문제가 여기서 최고 수준에 달하였다. 그것은 불명확성의 경계까지 닿아 있다. 북유럽의 동판화가는 이 그림을 회화적인 측면으로 해석해서 어두운 빛깔의 중앙부를 중심으로 둥근 빛의 테두리 속에 그룹의 모습을 넣고 있는데, 이는 레오나르도의 원칙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로 뒤엉킨 그림은 당시만 해도 '현대적인 과제였다. 전투 장면을 더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라파엘로 유파는 그런 종류의 대작 그림을 만들어낸 유일한 화파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의 전투>는 서양에서는 고전적인 전투 그림이다. 미술은 여기서 단순한 이야기만을 가지고 실질적인 대규모 행동을 묘사하는 단계로 진보하였다. 그렇으로써 이 유명한 그림은 레오나르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명료하지 못한 점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안목이 거칠어지고 미술이 추락하는 단계가 오는 것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라파엘로는 이 구성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 자기 유파를 남기지 않았다. 모두 그에게서 배웠지만 그의 인상은 미켈란젤로의 영향에 가려졌다. 레오나르도는 대규모의 인물상을 발전시켰으며, 결국 인물상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피렌체가 레오나르도의 영향에 있었더라면 아마도 전혀 다른 인상을 가졌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영향이 안드레아 델 사르토, 혹은 프란차 비조(Franciabigio, 1482~1525)와 부 자르디니(Bugiardino) 속에 살아남은 것은 전체적으로 별 것이 아니다. 롬바르디아 지방에서만 그의 예술이 직접적으로 계승된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한 가지 측면뿐이었다. 롬바르디아 사람들은 회화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건축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였다. <최후의 만찬>의 구조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레오나르도의 그룹화와 움직임의 덩어리들도 여기서는 관심 없는 문제였을 뿐이다. 활동적인 기질의 사람들은 움직임  묘사하면서 상당히 혼란스럽고 삭막하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피곤한 단조로움만 보였다.
은 영향을 끼쳤다.  롬바르디아 지방에서는 레오나르도 예술의 여성적인 측면이 가장 많고 거의 연기와도 같은 입체성으로 묘사하는 측면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여체의 아름다움에 매우 민감하였다. 그는 우선 피부의 부드러움을 느꼈다고 말할 수 있다. 피렌체에 있는 동시대 화가들도 벌거벗은 여체를 그렸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매력이 없다. 피에로 디 코시모처럼 극히 회화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피부의 질감보다는 형태에 대한 관심이 컸다. 레오나르도의 입체화 기법이 보여주듯이 더욱 섬세한 촉감이 깨어나면서 여체는 새로운 예술적 의미를 얻었다. 그리고 이런 심리적인 전제에 따라서, 레오나르도는 이 주제를 탐구하였으리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연치 않게도 우리는 이 분야에 그의 그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
가장 중요한 작품이 아마 <레다>였던 것 같다. 이 작품은 뒷날 모작만 전해진다. 살며시 움직이는 아름다운 나체의 여인이다. 그녀는 서서 무릎을 모으고 백조를 밀어내는 듯 애무하고 있다. 상체를 틀고 있는 조형적인 대립, 머리의 각도, 가로지른 팔, 아래로 처진 어깨 등으로 이 인물은 아주 풍부한 효과를 낸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
에 보관된 것으로, 한동안 소도마 Sodoma의 것으로 여겨졌다. ) 롬바르디아 지방 레오나르도의 후계자들 사이에는  일반적인 주제로 남았다. 그러나 그들은 몸 전체의 움직임에 대한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전신상을 포기하고  만족했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입체적으로 풍부한 모습을 기대할 수 있는 <목욕하는 수산나 같은 소재도 반신상이라는 공허한 도식으로 그려졌다(밀라노 보로메오에 있는 루이니의 그림). 이런 장르의 모범으로는 지안 피에 트리노(Gianpietrino)의 까다롭지 않은 반신상 <풍요의 여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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