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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의 발전은 이런 초기 작품들과 잘 맞지 않는다. 내면의 떨림이 사나운 외적인 움직임으로 바뀌고, 그림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진지하고 평온한 태도로 카르멜 수도원에서 마사초 제단을 완성했던 이 화가가 말년에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프레스코를 그린 사람임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그는 외적인 장식이 무한히 풍부하였다. 보티첼리의 경우 암시만 되었던 요소, 곧 환상적이고 과도한 요소가 그에게서는 강렬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는 움직임을 향해 달려들어서 풍요로운 동작을 통해 화려한 모습을 보인다.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로마)의 <성모 마리아의 승천>은 바쿠스적 황홀경에 도취된 천사들의 모습이 가히 환희에 찬 장면으로 나타난다.

레오나르도 , 바위동굴 속의 성모

 

그런 다음 그는 다시 단순한 불안에 빠져들어 거칠고 천박하게 된다.
성 필립보의 순교를 그리면서 그는 우스꽝스러운 의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대신, 십자가가 밧줄에 매달려 올려지는 도중 공중에서 흔들리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여기서 내면의 기율이 부족한 탓으로 아주 위대한 재능이 망가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훨씬 덜 감정적인 사람들이 예를 들면 기를란다요- 그보다 훨씬 탁월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 두 사람이 나란히 붙은 제단을 장식해놓은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구경꾼은 필리피노의 불안정한 이야기들에는 금방 싫증이 나고, 건실하고 우직한 기를란다요가 진짜 지속적인 즐거움을 선물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기를란다요는 한 번도 과도한 감정으로 고통받지 않았다. 그 또한 대단한 기질을 가졌지만 개방적이고 명랑한 성품과 장엄하고 생동하는 것에 대한 기쁨이 호감을 준다. 그는 대단히 오락적이고, 피렌체의 생활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려주는 화가이다. 그는 이야기의 내용을 가볍게 여겼다. 산타마리아 노벨라의 성가대석에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생애를 그렸다. 그는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원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의 그림만 보고 그 내용을 알아내기 어렵다.
성모 마리아가 사원에 가는 길을 조토는 어떻게 그렸던가! 어린 마리아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원의 계단을 오르고, 그녀를 맞아 고개를 숙인 사제, 그리고 눈길과 손짓으로 아이를 따라가는 부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를란다요의 경우에는 잔뜩 치장한 학생이 길이 바쁜데도 애교스럽게 곁눈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제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기둥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는 무심한 태도로 멍하니 그것을 지켜본다. <결혼식> 장면에서 마리아는 반지를 교환하기 위해 기품 없이 서두르고, <성모의 방문>에서는 두 여자가 나란히 걸어가면서 아름답기는 하지만 아주 세속적으로 인사하는 모습뿐이다. 즈가리야에게 천사가 나타나는 장면에서 그냥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 수많은 인물들이 그림의 전면에 나타나면서 원래 이야기를 가리건만 기를란다요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그는 묘사하는 사람이지 이야기꾼이 아닌 것이다. 대상 자체가 그에게 기쁨을 준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얼굴들의 표정을 그렸다. 바사리가 그를 보고 생생한 기질의 움직임을 표현했다고 찬양했지만 이 판단은 잘 맞지 않는다. 그는 동작보다는 평온을 더 잘 나타낸다. 어린이 학살 같은 장면들은 그의 것보다는 보티첼리의 것이 더 낫다. 보통 그는 단순히 평온한 묘사에 머물러 있었고, 움직임을 좋아하는 시대의 취향을 위해서는 그저 서두르는 하녀나 그 비슷한 인물들을 그려서 약간의 기여를 하는데 그쳤다.
그의 관찰은 친근한 구석이 없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상당수의 사람들 매우 열렬하게 입체감과 해부, 색채기술, 대기의 원근법 등을 탐구하였지만 그는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다. 그는 회화에서 실험을 하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시대의 평균적인 특성을 갖추고, 그것을 이용해서 새로운 기념비적인 효과를 만들려고 했던 예술가였다. 양식적으로 그는 세부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큰 효과를 향해 나아갔다. 그는 풍부하면서도 명료하고 장중하며 때로는 위대하기도 하다.
그가 그린 <마리아의 탄생>에 나오는 다섯 여인들의 모습은 15세기에는 없는 것이다. 그가 구성의 모티프로 시도한 것, 곧 이야기를 중심점에 놓고 주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16세기 대가들과 직접 연결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업적의 가치를 지나치게 평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산타마리아 노벨라에 있는 기를란다요의 회화들은 1490년경 완성되었다.
바로 이어지는 시기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나왔다. 이 작품을 피렌체의 기를란다요의 것과 비교해본다면 기를란다요의 '기념비적 작품은 거의 빈곤하고 제한된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형식상 비할 바 없이 위대하고 형식과 내용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기를란다요의 작품이 15세기 피렌체의 업적을 총괄하였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이 말은 레오나르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세부 관찰이 섬세하고, 전체를 파악하는 점에서 위대하다. 탁월한 도안가이자 위대한 화가이다. 당시 모든 화가들의 특수한 문제들을 그가 발전시켰다. 그러고도 그는 개성의 깊이와 풍부함에서 그들 모두를 능가하였다.
레오나르도는 보통 15세기 전체와 함께 다루어지곤 하므로 사람들은 그가 기를란다요보다 약간 나이가 젊고, 필리피노보다도 나이가 위였다는 사실을 쉽사리 잊어버리곤 한다. 그는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함께 공부한 화가들 중에는 페루지노(Perugino, 1450∼1523)와 로렌초 디 크레디 (Lorenzo di Credi) 등이 있다. 로렌초 디 크레디는 스스로 빛을 내지는 못하고 다른 태양의 빛을 받아들이는 별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학생이 주어진 과제를 부지런히 수행한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해 페루지노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것을 만들어냈고, 피렌체 미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베로키오의 제자들은 스승의 수업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베로키오 작업장은 분명 피렌체에서 가장 다양한 작업장이었다. 회화와 조각을 결합시킨 일은 때마침 조각이 방법론적으로 자연을 철저히 탐색하려는 경향을 보이던 때라 더욱 촉진되었다. 그러면서 멋대로의 개인적인 양식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갈 위험성은 적어졌다. 레오나르도와 베로키오 사이에는 내적인 연결성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사리를 읽어보면 그들의 관심이 얼마나 가까웠으며, 베로키오가 시작했던 실마리들을 레오나르도가 얼마나 많이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제자의 초기 그림들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베로키오의 <세례>(피렌체, 아카데미)에 들어 있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나온 음성처럼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15세기 피렌체의 성모들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바위동굴 속의 성모> 같은 그림은 얼마나 독특한가!
성모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으며 옆모습이 아니라 앞모습이 그려져 있다. 자기 옆에서 몸을 앞으로 굽힌 채 아기 예수를 향해 기도하는 아기 세례 요한을 오른손이 감싸고, 왼손은 움직이는 중이라 줄어든 모습으로 공중에 떠 있다. 바닥에 앉은 아기 예수는 축복의 손짓으로 응답한다. 크고 아름다운 천사가 역시 무릎을 꿇고서 아기를 받치고 있다. 천사는 그림 속에서 유일하게 그림 바깥의 구경꾼 쪽을 바라보는 인물이다. 방향을 가리키는 오른손은 이런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길 안내 표지판처럼 명료하고 단순하게 사건을 가리키는 순수한 옆모습의 손이다. 이상하고 신비로운 바위 덩어리는 저쪽 바깥 빛을 향해 이곳저곳이 열려 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의미심장하고 새롭다. 주제도 그렇고 그것을 다룬 방식도 그렇다. 각 개인의 동작은 자유롭지만 그룹 전체로는 완벽한 법칙성을 드러낸다. 형태의 끝없이 섬세한 생동감과 새롭고 회화적인 빛의 계산, 그것은 분명히 어두운 배경을 통해서 인물들에게 강한 입체적 효과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상상력을 저 깊은 곳으로 끌어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원경의 단호한 인상은 견고한 현실성이고 또한 삼각형 그룹으로 법칙적인 효과를 내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건축적인 뼈대를 가진다. 이 말은 이전의 화가들이 보여준 단순한 좌우 대칭과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한다. 자유가 더 많으며 동시에 법칙성도 더 많다. 개별적 요소는 전체의 맥락에서 파악된다. 그것이야말로 16세기 양식이다. 레오나르도는 16세기의 흔적을 일찍부터 선보였다.
바티칸에는 무릎 꿇은 성 히에로니무스가 사자와 함께 있는 그의 그림이있다. 동작 모티프로서의 인물이 특이해서 옛날부터 주목을 받았다. 레오나르도 말고 대체 누가 그렇게 선만으로 성인과 사자를 함께 있도록 만들 수 있었을까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레오나르도 말고 이렇게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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