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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아식은 B.C. 400년 초에 일어났으며 수수하고 무게가 있어 질박(質樸) 한 것이 특징이다. 주신(柱身)이 불룩(Entasis)하고 밑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며 주두는 간소하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과 아이기 나의 아파이아 신전」은 그의 좋은 예가 된다. 다음에 이오니아식은 소아시아와 그리스 동북 지역에서 성행하였으며, 그 기원은 도리아식보다 다소 늦다. 주신은 대체로 날씬하고 가냘프며 주두가 나사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파르테논 신전 후면에 있는 「에렉 테이 온 소신전」과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에 있는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코린트식은 아칸서스(Acanthus)의 잎 모양으로 된 화려한 장식의 주두에, 주신에는 플루우팅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양식은 어디에서 보나 같은 형태이며 주로 로마 시대 이후 즐겨 사용되었다. B.C. 450년에서 그 후 약 25년 동안 아테네의 수장은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9~429년)였다. 그는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마침내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 (B.C. 479년)한 여세로 지중해 일대에서 제일가는 강국이 되었고, 미술 분야에서도 황금기를 맞는 클래식(Classic) 전기가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파르테논 신전」이며, 이는 그리스 건축을 대표하기도 한다. 수장 페리클레스는 그 당시 제일가는 조각가 페이디아스(Pheidias)를 총감독으로 하고, 건축가 칼리 크라테스(Callicrates), 익티누스(Ictinus) 등으로 하여금 건축하도록 하였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시 중앙 나지막한 언덕 아크로폴리스에 서 있으며, 아테나 여신을 모신 곳이다. 이 신전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그 완전한 균형과 비례에 있다. 도리아식으로 된 원주의 높이와 두께, 짜임새 있는 팀파눔의 형태, 이 모든 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 아름다운 맵시란 실로 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신전은 앞뒤에 각 8주(柱)씩, 양옆에서 볼 때 17 주씩 원주가 나란히 에워싸고 있다. 세모 난동서 양 팀파눔에는 [아테나의 탄생] [아테나와 포세이돈(Poseidon)과의 싸움 그리고 그리스와 아마존의 싸움] 겐타 우르스(Kentaurs)와 라피타가(Lapithai)의 싸움」「트로이의 전쟁」 등을 조각으로 꾸몄고, 내부 난간(欄干)에는 「판아테나이아의 행렬의 모습을 부조로 꾸몄는데 모두가 피디아스의 손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다. 그는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이미 소멸되었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또한 이 시기에 조각을 대표하는 작가로 피디아스 외에 뮈론(Myron) 원반 던지는 사람」, 폴리클리투스(Polykleitos) [창을 멘 청년」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그리스의 이상미의 구현자로서 이후 유럽 미술이 나갈 새로운 길을 열었다. 스캔된 문서 - 한편 클래식 후기에 접어들면서, 그 이전의 이상미를 추구하였던 ponnesos.B.C. 431~404년) 전쟁에 시달린 그리스의 예술가들우미한 표현 양식은 크게 달라진다. 말하자면 펠로폰네소스(Pelo. 은 일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전시대의 엄숙하고 평정한 성격은 날로 섬세하고 격동하기 쉬운 감정의 세계로 기울어져서 미술도 인간의 슬픔과 괴로움을 즐겨 표현하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가 로프 락시 텔레스(Praxiteles), 스코파스(Skopas), 리십 포스(Lysippos)스(Cnidos)의 비너스」등 대리석을 통해서 특히 모발과 감상적(感을 들 수 있는데, 프락시 텔레스는 헤르메스(Hermes)상」「크니도傷的)인 표정을 잘 다루었다. 스코파스는 「니 오비두스(Niobidus)의 군상」등 신화적인 내용을 주제로 정열적인 감정의 세계를 즐겨 다루었다. 증오, 비애, 격정 등 마치 산 인간의 표정을 느끼게 하는 새로운 조각의 경지를 열었다. 다음 리십 포스는 위 두 사람과는 달리 영웅 또는 투사의 힘찬 모습을 교묘한 수법에 의해서 표현하였으며 「제우스의 신상」은 그의 대표작이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리스 말기의 미술 B.C. 338년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립푸스 2세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그의 아들 알렉산더(Alexander:B.C. 356~323년) 대왕은 그리스 전토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어서 이집트, 페르시아를 거쳐 인디아 일부 지역까지 정복하였다. 이에 따라 나일강에서 인더스강에 이르는 광대한 일대에 걸쳐 헬레니즘(Hellenism) 문명이 퍼지게 되었다. 이로써 아테네는 그리스 예술의 중심적 지위를 잃었고 대신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로도스(Rhodos), 페르가몬(Pergamon) 등 세 도시로 옮아 갔으며, 자유도시 체제는 동양적 전제 국가로 변하면서 예술의 위치는 왕의 예속 물로 되었다. 이에 따라 미술의 표현은 마침내 왕이나 영웅, 투사들의 초상을 표현하게 되면서 현실주의적 경향으로 흘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미술은 클래식 후기의 현세적 인간 감정에 동양적인 통속성이 가미되어 강한 사실주의 표현으로 전환되었으며, 그 한 예로 어느 가리 아인이 자기 처를 죽이는 「자살하는 가리아(Gaul)인과 그의처」「죽어 가는 시리아인」등은 바로 그것이다. 또한 트로이의 한 승려가 두 아들과 함께 구렁이에 휘감겨 죽어 가는 「라오콘」은 이 시대의" 성격을 실감하게 한다. 이러한 경향은 그 후 로마 시대로 이어져서 전 세계로 퍼지게 한 헬레니즘 문화의 공헌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상 그리스 미술의 주축을 이룬 건축과 조각을 시대별로 그 흐름을 살펴보았는데, 회화 분야는 소멸하기 쉬운 탓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옛 문헌이나 폼페이의 발굴된 벽화로 그 윤곽을 살필 수 있을 뿐, 그 재료가 희소하다. 한편 도자공예에 그려진 적회식(赤繪式)과 흑 회식(黑繪)의 표현 수법을 통해서, 이 시대의 높은 회화의 수준을 살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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