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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 <마카베오> 하권에 시리아의 장수 헬리오도로스

 

자기 나라 왕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과부와 고아들의 돈을 약탈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간 이야기가 나온다. 돈을 빼앗기게 된 여자들과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거리를 돌아다닌다. 제단에서 사제는 놀라움에 창백해진 모습으로 기도를 드린다. 아무리 이야기하고 간청해도 헬리오도로스는 자신의 의도를 거두지 않고 보물실을 열고 금고를 약탈한다. 그때 갑자기 황금 갑옷을 입은 하늘의 기사가 나타나 도둑을 쓰러뜨리고 말발굽으로 짓밟는다. 그동안 하늘의 기사를 수행한 두 젊은이가 그를 채찍으로 때린다. 이것이 성서의 내용이다.
라파엘로는 연속적인 순간들을 포함하는 내용을 하나의 그림 안에 모았다. 옛날 화가들처럼 여러 장면들을 옆으로 혹은 위아래로 나란히 늘어놓는 방식이 아니라 장소와 시간의 통일을 분명히 유지한 가운데 그것을 이루었다. 그는 보물실에서의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헬리오도로스가 약탈한 보물을 들고 사원을 떠나려는 순간을 보여준다. 울부짖으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는 여자와 아이들을 같은 장소에 있게 해서 하느님의 개입에 대한 증인들로 만들고 있다.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는 사제는 그림에서도 원래 자신의 자리인 제단에 있다.
당시 관객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라파엘로가 장면들을 배치한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그림 한가운데서 중심 사건을 보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여기서는 중심부가 텅 빈 채 결정적인 장면은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우리는 이런 구성이 당시 사람들에게 주었던 인상의 강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없다. 그 이후로 전혀 다른 종류의 '형식 없음'에 대해서까지도 너그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정말로 기적의 갑작스러움을 고스란히 지닌 이야기를 눈으로 본다고 여겼다.
게다가 이 형벌 장면은 새로운 연극 법칙에 따라 전개되어 있다. 15세기에 묘사되던 것들이 여기서도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헬리오도로스는 피를 흘리면서 말발굽 아래 쓰러져 있고, 양쪽에서 채찍을 든 청년들이 그를 향해 달려든다. 라파엘로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악행을 범한 자는 방금 쓰러진 참이다. 기사는 말고삐를 잡아당겨서 발굽으로 그를 밟으려 한다. 채찍을 든 젊은이들은 이제야 앞으로 달려든다.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는

나중에 아름다운 작품 <성 스데파노가 돌에 맞아 죽음>(제노바)을 이런 방식으로 구성하였다. 사람들이 던진 돌이 쌓여 있지만 성인은 아직 다치지 않은 것이다.
젊은이들의 움직임은 이렇게 됨으로써 특별히 유리해진다. 그들이 달려드는 모습이 말에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우리의 상상력이 모르는 사이에 갑작스러운 출몰 현상을 보충하기 때문이다. 바닥을 아예 건드리지도 않는 빠른 발 동작이 경탄할 정도로 묘사되어 있다. 말은 그렇게 훌륭하지 못하다. 라파엘로는 동물 화가가 아니었다.
15세기라면 형벌을 받아 쓰러진 헬리오도로스에게 비천한 악당의 특성을 부여하고, 유치한 취향으로 그에게 제대로 된 머리카락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16세기는 다르게 생각한다. 라파엘로는 그를 비천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의 수행원들은 싸우며 덤벼들고 그 자신은 쓰러진 상태에서도 침착성과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머리는 16세기 표현 에너지
의 모범적인 예이다. 고통에 차서 머리를 쳐든 모습은 약간의 형식만으로 본질적인 것을 다 보여주는데, 그 이전에는 이런 종류의 것이 없었다. 신체 모티프 또한 아주 새롭고 미래에 계속될 종류의 것이었다.
기사 그룹 맞은편에서 여자들과 아이들을 보게 된다. 바싹 뭉쳐서 동작이 중단된 채 전체의 윤곽선에 갇힌 모습이다. 단순한 수단만 써서 대중이 몰려 있다는 인상을 표현하고 있다. 인물의 수를 헤아려보면 그들이 얼마나 적은 수인지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런데도 질문하면서 위를 바라봄, 가리켜 보임, 뒤로 물러섬, 숨으려고 함 등 모든 동작이 강한 선으로, 그리고 효과 만점의 대립 속에 포착되어 있다.


대중들 위에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이동식 전용 의자에 아주 조용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는 그림의 안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수행원들 역시 초상화로 되어 있는데 그들도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에 전혀 동참하지 않는다. 라파엘로가 어떻게 이 그림의 정신적인 통일성을 이렇듯 포기하였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15세기 방식으로 그림에 손수 입회하기를 원한 교황의 취향에 양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 든다. 미술 논문들은 그림의 모든 인물들이 그 안에 벌어지는 현실에 참여하기를 요구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와는 다른 것이다. 이 경우에 라파엘로는 교황의 변덕에서, 이야기에 드러난 너무 큰 흥분에 대해 고요함이라는 대립 감정을 얻는다는 이점을 이끌어냈다.
안쪽을 향한 기둥에는 두 소년이 올라가 매달린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하는가? 이렇듯 눈에 띄는 모티프가 쓸데없는 첨가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들은 쓰러진 헬리오 도로스에 대한 균형으로서 전체 구성을 위해 필요하다. 저울의 접시가 한쪽으로 가라앉았으니 다른 쪽이 높이 올라간 것이다. '아래쪽은 이런 대립을 통해서 비로소 효과를 얻는다. 기둥에 기어올라간 소년들은 이런 효과 말고도 또 다른 기능을 발휘한다. 그들은 그림의 안쪽, 즉 기도하는 사제가 있는 한가운데로 눈길을 끌어들인다. 그는 제단에 무릎 꿇고 앉아서 자신의 기도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어쩔 줄 모른 채 간구한다는 기본 정서가 중심부에 포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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