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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

16세기 이탈리아 미술

love으뜸 2022. 5. 1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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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15세기의 소박한 사실주의가 점차 이상주의(理想主義)적인 사실주의로 진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정신을 대표하는 대예술가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년)와 미켈란젤 Michelangelo : 1475~1564년)였다. 레오나르도는 인간의 이 상상(理想像)을 숭고성과 신비성에서 구하려고 하였고, 그가 그린 「마리아상은 모성의 최상의 모습이며, 특히 [모나리자는 여성미의 이상인 것이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인간의 이 상상을 힘과 장대한 것에서 구하려고 하였다. 최초의 대표작 「다비드상(David), 세계 최대의 회화 시스티나(Sistina) 성당의 천 장화와 제단화, 그리고 성 베드로 성당의 도움」 등, 이 모든 것은 미켈란젤로의 이상주의 구현의 좋은 예가 된다. 또한 이러한 표현 형식은 브라만테 (Bramante : 1444~1514년)의 건축이나, 라파엘로(Raffaello :~의 1483~1520년)의 회화에서도 살필 수 있다. 즉 브라만테의 장대한 정숙과 라파엘로의 우미함이 그것이다.

한편 이 세기에 접어들면서 항구 도시 베네치아 회화의 대두가 현저했다. 이 지역의 회화의 특색은 피렌체, 로마에 비해서 보다 세속적이며, 형태미보다는 화려한 색채와 육체의 풍려한 점에 있다.
이들 베네치아파의 성립과 전개를 그대로 대변해 주는 것이 티지아노(Tiziano : 1476~1576년경)의 작품이다. 그는 1세기를 살면서 베네치아 화단의 지배자로 활약하였고 그의 예술은 일관해서 밝고 건강한 관능의 희열을 표현한 것이 특색이다. 그를 둘러싼 일련의 화가들 중에는 단명한 지오르지오네(Giorgione : 1478경~1510년)가 가장 뛰어났으며, 그 외에 베로네제(Veronese : 1528~1588년), 팔마 베키오(Palma Vecchio : 1480~1528년)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말하자면 16세기의 조용하고 단순한 표현 형식을 벗어나, 움직임과 복잡함, 그리고 명암의 대립을 구사한 극적인 장면을 즐겨 표현하였다.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 르네상스의 일반적인 의의로서 인간과 자연의 재발견이라는 것이 지적되고 있는데, 이는 현실 세계에 대한 재인식의 자각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자각이 이탈리아에 있어서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화와의 관련해서 비롯되지만 플랑드르(Flandre :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일부에 걸친 북해 연안 지역)를 포함한 북유럽에서는 그들의 생활 자체에서 자연히 자라났다. 원래 이 지방은 기후 풍토가 좋은 조건이 못 되어 자연히 근면해야 했고, 자연에 대한 관찰에 민감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기풍은 순박한 가정생활에 기반을 둔 지극히 서민적인 것이며, 대지(大地)에 애정을 갖는 것이었다. 15세기 이래 전 유럽에 퍼진 자연주의적 경향은 이들 플랑드르 지방의 생활 감정과 쉽게 결부되었던 것이며, 이 같은 것은 그들의 미술을 형성하는 기반을 이루게 하였다. 그리하여 평범한 현실의 일상생활이나 자연을 충실히 표현하는 자연주의적인 사실주의가 이 미술의 특질로 나타났다. 우선 플랑드르가 15세기 중엽부터, 그리고 도이칠란트, 프랑스, 에스파니아, 영국 등은 16세기 후반부터 르네상스가 전개되었다.

플랑드르 지방은 일찍부터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여 다른 나라와의 왕래가 빈번하여지면서 14세기 말엽에 이미 회화, 조
각, 공예 등 미술의 중심지가 되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반 아이크(Van Eyck) 형제(형 Hubert : 1370~1426년, 아 Jan : 1390~1441년)의 출현은 근대 회화에 일대 변혁의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유화의 재료를 발명하여 회화의 표현이 한층 자유로워졌음은 물론 정확하고 힘찬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저 유명한 「켄트(Ghent)의 제단화는 이 두 형제가 그린 것으로, 그들은 이 작품에서 풍경과 대기 원근(大氣遠近)을 처음으로 썼다. 이 밖에 많은 초상화를 그렸는데 아르놀피니 부처(夫妻)의 초상]은 특히 유명하다. 그 후 이 두 사람을 따르는 이가 많았는데 그중에도 바이덴 (Weyden:1400~1464년경)은 극적인 감정의 세계를 묵직하고 엄격한 선과 밝은 색채로 특색 있는 그림을 그렸으며 「크리스트를 십자가에서 내리다」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 밖에 보우츠(D. Bouts : 1415~1475년), 멤링 (Memling : 1430~1495년경) 등이 있는데 특히 멤링의 화풍은 15세기 플랑드르 회화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으며, 그의 사실주의적 표현은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16 세기의 플랑드르는 초기까지 이탈리아식의 초상화와 제단화를 그린 마시스(Matsys : 1466~1530년)와 같은 이도 있었으나 대체로 독특한 이곳 고유의 화풍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러한 국민적 자각을 고취하려던 작가에는 봇 슈(Bosch : 1460~1516년)와 브뤼겔(Brueghel : 1528~1569년)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그 당시 브뤼셀(Brussels) 궁전을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식의 화가들과 좋은 대조가 되었다. 이 중 브뤼겔은 플랑드르의 리얼리즘을 새로 확립하였으며, 흙에 대한 그의 순박한 마음으로 이 지방의 고유한 풍토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애정 어리게 독특한 스타일로 그렸. 그 그린 수많은 작품 중에 이러한 특색을 잘 나타낸 것에는 「어린이들의 놀이』[농민의 결혼식」「맹인의 우화(萬話)」 등이 있다. 이 밖에 근대에 있어 풍경화의 시초가 되는 「바벨탑]은 풍경에 대한 새로운 미의 정립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도이칠란트 : 이탈리아에 뒤이어 플랑드르에서도 르네상스의 새 기운이 일기 시작한 것은 15세기였으나 이 무렵 도이칠란트는 아직도 중세적 고딕 미술의 성숙기였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세태는 차차 달라져 이곳에서도 비 중세적, 인간의 자유를 자극하는 새로운 생활 감정이 일기 시작하였다. 특히 1517년 10월 루터(Martin Luther : 1483~1546년)의 교황청에 대한 교권(敎權)의 봉기는 이러한 시대상을 잘 나타내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도이칠란트의 르네상스는 고딕 미술이 무르익은 그 터전에 전개되는 것이었던 만큼 크게 자극된 것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새로운 예술사조였다.
 16 세기의 도이칠란트가 낳은 세기적인 화가로는 조각, 건축, 판화가의 재능을 겸유한 뒤러(Dürer : 1471~1528년)를 들 수 있다. 그는 베네치아파의 감화를 받았으며, 다른 한쪽으로는 플랑드르의 화풍을 받아들였는데 [4인의 사도 한 예만 보더라도 반 아이크 형제의 영향이 짙다. 그러나 날카로운 선과 정밀한 필치는 그의 판화(木版, 銅版)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거장들의 작품에 비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 특유의 사실풍(寫實風)을 완성한 최초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뒤러와 아주 다른 이상주의의 경향을 띤 홀바인(Holbein : 1465~1524년경)이 있는데, 그는 뒤러의 냉철한 지성미와는 달리 고요한 품격의 미를 잘 표현하였다. 특히 그가 그린 초상화는 일품이며, 플랑드르, 프랑스 화단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에 건너가 궁중 화가가 되어 그곳 미술을 개척하기도 했다.

뒤러, 홀바인과 더불어 도이칠란트 르네상스의 삼대 화가의 한 사람인 크라 나하(Cranach : 1472~1553년)는 취재의 범위가 퍽 좁고이렇다 할 장점은 없으나 나체화와 초상화를 잘 그렸으며 루터의 초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일반 대중 친할 수 있는 빛깔과 사실적인 수법을 잘 썼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권에 있었던 프랑스, 에스파니아, 영국은 15세기 고딕 미술의 완성기였으며, 이후 이렇다 할 독자적인 미술로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1493년 차알스 8세의 이탈리아 침공, 그리고 16세기 초 해양국으로 급속히 발전한 에스파니아와 영국은 각처에 식민지를 갖는 등, 문물의 시야가 넓어지면서 점차 새 기운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는 다음 세기의 근대 미술을 주도하는 종주국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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