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연도에 관한 추측이 많았던 이 작품은 결국 그 원숙(圓熟)한 솜씨로 보아 1595년 당시 이탈리아는 매너리즘으로 지배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연주의적인 사실성에 충만된 이 그림은 이색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견 풍속화도 아니고, 초상화도 아닌 이 그림은 주제가 뜻하듯이 그리스 신화의 소재를 세속화한 것이다.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그림의 주인공 박카스는 카라밧지오 자신을 거울에 반영시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박카스는 애면 모습의 젊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혈기에 차있는 이탈리아의 젊은이를 보여 주고 있다. 건장한 신체와 낙천적인 표정의 박카스는 술잔을 들고 탁자 앞에서 과실과 술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작품은 정확한 묘사에 의하여 조소적인 표출이 되어 있고, 탁상의..
현재 오스트리아의 달 마르티 아시는 15~18세기까지 이탈리아의 영역이었다. 이 시의 시민들이 세운 연구소에는 그 시의 출신인 성인들에 관한 그림이 그려져 장식되어 있는데, 그중의 한 작품이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이다. 연구실은 창문을 통하여 밝게 비쳐 있어, 말끔히 정리된 실내의 장면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의 특색은 당시의 서재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벽면 단상에는 장정된 서적, 목공예품 등이 단정하게 나열되어 있고, 도기 가구 등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소박하고 검소한 분위기를 서재에 주고 있다. 수도사이며 학자의 연구 분위기를 단적으로 알려 주고 있는 서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카라밧지오는 화면 구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실내의 정면 중심이 되고 있는 제단이 화면 구성의 ..
‘팬의 화가’란 이름은 보스턴에 있는 크라테르의 목인(牧人)을 쫓는 팬의 그림(그 반대 면(面)에는 아르테미스와 아쿠타 이온이 그려져 있다.)에서 유래한다. B.C. 480년경부터 세기 반쯤(약 30년간)까지 활동한 도화가(陶畫家)로서, 전부 100 종이 넘는 현존(現存)하는 유품이 거의 그의 손에 의한 것이다. 위대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독자적, 창의적인 연구로써 강한 표현력을 지닌 도화가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으리라. 이것은 보존 상태가 매우 훌륭한 펠리케(암포라와 같은 용도의 그릇)이다. 헤라클레스는 헤스페리데스의 사과를 구하러 이집트에 갔었다. 당시 이집트에는 포세이돈의 아들 부시리스가 군림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대단한 폭군으로 지나가는 외국인을 잡아 제우스의 제단에 제물로..
페르시아와의 기나긴 메디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B.C. 5세기 무렵의 전 그리스를 통합하는 델로스 동맹의 기운은, 미술면에 있어서도 그리스 각지의 작가들을 아테네에 모이게 했으며, 현자(賢者) 페리클레스 전제(專制)의 융성을 초래하였다. 마침 그 무렵에 앗티카와 펠로폰네소스의 조각 기술은 완벽에 가까왔으며, 역사가들은 그 시대를 아르 카이크 시대와 클래식 시대의 경계라고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아테네이며, 그때까지의 각지의 유파의 형식도 전 그리스적 경향에 종합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1세기 전 무렵 페이스 토라 토스 전제 시대에도 아테네에서는 예술 융흥을 볼 수 있었으니, 실로 파르테논을 중심으로 하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 예술의 종합 정점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