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의 대법원실에 있는 과시용 그림들을 본 다음, 두 번째 방인 역사 홀로 들어선다. 여기에는 또 다른 것이 있다. 새롭고 거대하며 회화적인 양식의 방이다. 인물 크기가 커지고 조형적인 현상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무거워졌다. 마치 벽 속으로 구멍이라도 뚫린 듯하다. 깊고 어두운 구멍에서부터 인물들이 솟아 나온다. 그림을 둘러싼 아치의 안쪽은 조형적인 명암을 갖도록 작업되었다. 이곳에 있는 그림들과 을 비교해 보면 그것은 거의 벽걸이 양탄자처럼 평면적이고 밋밋하다. 이곳에서는 인물의 수가 적어지지만 이 적은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더욱 강력하다. 인공적으로 섬세하게 짜 맞춘 인물상들이 아니라 강렬한 대립 속에서 상호 작용을 하는 막강한 덩어리들이다. 절반만 진실인 장식성은 전혀 없고, 포즈를 취한 철학..
라파엘로는 법학자들의 모임을 그리는 것을 피했다. 네 번째 벽에는 창문 양쪽으로 법학사(法學史)에서 따온 작은 의식(儀式)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그 위에 있는 아치에는 법을 다룰 경우 필요한 강인함, 조심성, 절도를 나타내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들 미덕의 인물들은 자기들이 상징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기쁘게 만들지는 않는다. 무심한 여인들 가운데 바깥쪽에 있는 둘은 강하게 움직이고 가운데 있는 여자는 조용하다. 좀 더 풍부한 동작 모티프를 위해 모두 깊숙이 앉아 있다. '절도'가 이해할 수 없도록 조심스러운 태도로 재갈을 높이 쳐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전체의 움직임으로 보아 에서 사포의 동작과 연관되어 있다. 살짝 뒤튼 상체와 몸을 가로지른 팔, 발의 위치 등이 비슷하다. 다..
라파엘로는 시인들을 그린 세 번째 그림 주문을 받으면서 한 번 더 같은 벽면에 마주 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기뻐했을 듯싶다. 한가운데 창문이 난 이 좁은 평면은 당연히 새로운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라파엘로는 창문 위쪽에 언덕을 만들었다. 생생한 파르나소스의 언덕이 되는데, 그 결과 앞쪽에 두 개의 공간과 위쪽에 더 넓은 무대가 마련되었다. 이것은 아폴론이 뮤즈들과 함께 앉아 있는 장소이다. 호메로스도 그곳에 머물고 있으며 배경에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모습도 보인다. 나머지 시인들은 언덕 기슭에 몰려 있다. 혼자 걷는 모습으로, 혹은 느슨한 대화를 주고받거나 활기찬 이야기꾼이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곳에서는 여럿이 그룹을 이루고 있다. 시작(詩作)이란 협동 작업이 아니므로 하나의 그룹화에서 시인들을 ..
신학의 맞은편에서 세속의 학문인 철학을 찾아낼 수 있다. 이 그림은 이라고 부르지만 이 제목은 만큼이나 멋대로 갖다 붙인 이름이다. 굳이 원한다면 차라리 이 그림을 두고 '논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심 모티프가 논쟁하는 철학계의 두 거장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처에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소크라테스가 있다. 그는 질문 놀이를 하면서 손가락으로 전제들을 헤아린다. 그다음으로는 욕망 없는 사람의 의상을 입은 디오게네스가 계단에 누워 있다. 음표가 새겨진 판을 앞에 놓고 무언가를 쓰고 있는 나이 든 사람은 아마 피타고라스일 것이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와 조로아스터 등의 천문학자들, 기하학의 유클리드를 덧붙이면 이 그림의 역사적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