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끝까지 와닿는 기다란 옷을 걸치고 있는 청년의 늠름한 모습이다. 이 젊은이의 상(像)과 더불어 말(馬)의 뒤쪽 다리(後足)나 말의 꼬리(尾) 그리고 전차(戰車)의 바퀴나 전차의 단편(斷片)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젊은이는 전차 (獸車、馬車) 경주(競走·競爭)의 우승자(優勝者)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이 젊은이의 상(像)은 전차 경쟁에서 우승한 기쁨에 넘친 승리자의 상인 것이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면, 첫째 옥안(玉眼)이 완전하고 뚜렷하여 씩씩한 기상을 엿볼 수 있으며, 둘째로 그의 표정은 우승의 영광에 상기된 긴장감을 느끼게 함과 아울러, 매우 용맹스러운 남자다운 힘을 과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진취적인 기상과 남자답게 약동하는 힘찬 그의 표정에서 그 경기의 긴장감을 우리에게 ..
이 소녀상은 상반신과 다리 부분, 그리고 대석만이 남아 있고 허리에서 무릎 바로 위까지의 부분은 없어졌다. 대석 옆구리에 ‘다리아 르코스 사람 에우튜디코스 봉납’이라는 명문이 있어 제목과 같은 이름이 붙었다. 어느 아버지가 딸의 소망을 위해서 봉납했을까? 자세, 복장, 그리고 수호 여신에게 바친다는 점에서는 다른 아르 카이크 소녀상들과 같지만 많은 점에서 또 다른 독창성을 보인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입술의 표현인데, 입 끝이 위로 올라간 소위 아르 카이크 스마일(archaic smile)과는 반대로 입 끝이 내려가, 야무지게 다문 입가에는 엄숙한 기운마저 감도는 것이, 이미 아르 카이크를 벗어난 느낌이다. 또 한 가지는 목의 옆쪽에서 등으로 돌아가는 부분은 머리로 가려져, 납작하게 입체감이 나지..
체구보다 훨씬 작은 편이나 채색이 가장 잘 보전되어 있으며, 대리석은 키오스섬 산이다. 작품도 이에 알맞게 되어 있어 키오스섬 제작설도 있다.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B.C. 560~527년)와 그의 아들들(B.C. 527~510년)의 치세에는 동방에서 많은 이오니아계 시인, 조각가, 도화가가 아테네에 와서 활약하고 있었고, 아티카 미술이 이오니아의 영향을 짙게 받아 전개되던 시대였다. 소녀는 실로 뜬 키톤 위에 히마티온을 걸쳤는데 색깔이나 무늬가 매우 화사하다. 히마티온의 색은 지금은 녹색으로 산화했지만 밝은 군청색이고 꽃을 여기저기 흩은 무늬가 아름답다. 왼쪽 겨드랑이에서 오른쪽 어깨로 올려 걸쳐 입은 것도 변화가 있다. 붉은 보라의 메 안델과 십(+) 자 무늬를 파란(지금은 녹색 ..
올림피아에서 출토된 것인데 사모스섬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족진 머리의 모양으로 보아서 거울의 손잡이거나 세발솥(鼎)의 발 아니면 촛대(燭臺)이거나 아무튼 위로 무엇인가를 받치고 있던 물건임에 틀림없다. 사모스섬은 여신 헤라(제우스의 정비)의 성지이며, 이 상도 얼른 보아서 잘 알려진 루브르의 케라 뮤 에스 봉납상을 비롯한 몇 개의 현존하는 ‘사모스의 헤라’의 모양을 상상하게 하지만 왼손을 가슴에, 오른손을 앞으로 한――여기서는 이오니아식의 키톤(Chiton:고대 그리스의 의상의 일종) 끝을 잡고 있지만 자세는 훨씬 후의 '부끄러워하는 비너스’ 나상(裸像) 모양에 가깝고 이 소상도 동방적(東方的) 아프로디테 인지도 모른다.상감해 넣은 눈동자가 없어진 이외에는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족진 머리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