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의 화가’란 이름은 보스턴에 있는 크라테르의 목인(牧人)을 쫓는 팬의 그림(그 반대 면(面)에는 아르테미스와 아쿠타 이온이 그려져 있다.)에서 유래한다. B.C. 480년경부터 세기 반쯤(약 30년간)까지 활동한 도화가(陶畫家)로서, 전부 100 종이 넘는 현존(現存)하는 유품이 거의 그의 손에 의한 것이다. 위대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독자적, 창의적인 연구로써 강한 표현력을 지닌 도화가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으리라. 이것은 보존 상태가 매우 훌륭한 펠리케(암포라와 같은 용도의 그릇)이다. 헤라클레스는 헤스페리데스의 사과를 구하러 이집트에 갔었다. 당시 이집트에는 포세이돈의 아들 부시리스가 군림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대단한 폭군으로 지나가는 외국인을 잡아 제우스의 제단에 제물로..
페르시아와의 기나긴 메디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B.C. 5세기 무렵의 전 그리스를 통합하는 델로스 동맹의 기운은, 미술면에 있어서도 그리스 각지의 작가들을 아테네에 모이게 했으며, 현자(賢者) 페리클레스 전제(專制)의 융성을 초래하였다. 마침 그 무렵에 앗티카와 펠로폰네소스의 조각 기술은 완벽에 가까왔으며, 역사가들은 그 시대를 아르 카이크 시대와 클래식 시대의 경계라고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아테네이며, 그때까지의 각지의 유파의 형식도 전 그리스적 경향에 종합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1세기 전 무렵 페이스 토라 토스 전제 시대에도 아테네에서는 예술 융흥을 볼 수 있었으니, 실로 파르테논을 중심으로 하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 예술의 종합 정점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파..
최근(1964년)에 아테네의 시문(門)인 디필론 앞의 성도(聖道) 곁에서 발굴된 묘비이다. 고대에 어떠한 이유로 파손에 앞서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부조의 바탕에는 전면에 밝은 청색이 칠해져 있으며 발아래에는 빨갛게 채색한 흔적이 남아 있다. 꼭대기 중앙에는 문장 모양(紋章模樣)으로 마주 보고 있는 표범과 사자가 그려져 있고, 양쪽 가장자리(兩端)에는 뱀이 그려졌으며, 그 위의 아크로 테리아에는 팔 멧트(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샌들의 끈도 물론 물감으로 그려져 있고, 이 묘의 주인공의 시선은(사진에서는 스토렌 흠집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정한 자리라고 볼 수 없는 곳을 향하고 있다. 이 묘비 아래의 묘에서는 다른 부장품과 더불어 두 가지의 청동제 스토렌..
종교의 성지 엘레우시스에서 나온 대부조이다. 봉납 부조(奉納浮彫)로서는 이례적인 크기로서 현존 유품(現存遺品) 중에서는 가장 크며, 그 크기는 이 부조의 종교적 의미의 크기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크기에 비해서 부조는 얕은 편이다(가장 깊은 곳이 5cm 정도밖에 안 된다). 중앙에 발가벗은 소년이 경건한 모습으로 서 있으며, 앞에 서 있는 여신의 손에서 무엇인가를 받으려 하고 있다. 앞에 있는 여신 데메테르는 왼손에 기다란 지팡이를 가지고, 오른손에 든 것을 소년에게 주려고 하고 있으며, 소년의 배후에 있는 여신 페르세포네는 오른손을 소년의 머리에 얹고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금속으로 만든 관을 소년의 머리에 씌우며 축복하고 있었을 게다. 세 사람이 모두 끈이 달린 샌들을 신고 있는데, 소년의 것은..